대부분의 제 3세계 국가들이 그렇듯, 우리 역시 쓰면 그대로 소설이 되는 험난한 역사를 견뎌 왔다. 작가가 역사를 위해 복무해야지 역으로 역사가 작가를 위해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이 파란많은 땅이 작가들에게 최상의 집필환경을 제공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남현 서울대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 작가에게 “역사와 상황은 최고의 고전(古典)이 되어” 왔고 이들은 “선배들의 명작을 읽고 소설을 쓰기보다는 역사를 읽고 상황을 해부함으로써 상상력을 키워”갔던 것이다. 박경리, 황석영, 조정래, 김원일, 임철우 등 한국 소설사의 굵직한 이름들이 모두 역사를 문학 텍스트로 옮겨 놓은 성실한 번역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대열의 맨 첫머리에 월탄 박종화(1901～1981)가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금삼의 피』 『대춘부(待春賦)』 『다정불심(多情佛心)』 『세종대왕』 등 작가 생활의 대부분을 2～6권짜리 대형 역사소설 집필에 소진한 월탄이 낭만주의 시운동을 그의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가 이상화,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창간한 잡지 『백조』는 한국 낭만주의 문학의 모태가 되었고 1924년에 발표된 그의 출세작 『흑방비곡(黑房悲曲)』은 이 시기의 시작(詩作)활동을 집대성한 시집이다. 그가 역사소설에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을 점령하고 있던 카프문학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민족과 역사를 떠난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하며 우리 역사에서 소재를 채취한 방대한 분량의 소설들을 써내 그의 주장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그는 또한 소설창작 외의 공적인 활동에도 많은 정력을 쏟아부었는데, 그의 소설처럼 그의 문단활동 역시 보수적․민족주의적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방 전에는 카프에 대항해 민족주의 진영을 이끌었고, 해방 후에는 전국문필가협회,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등을 조직해 좌익계 문인단체에 맞섰다. 그후 서울신문 사장과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한 뒤 타계 직전인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의 역사소설들은 독자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데 기여했지만, 역사를 자의적으로 오용하고 오락화․단순화시켰다는 부작용도 동반했다. 그리고 이런 긍정-부정적 효과는 그대로 한국 역사소설 일반으로 확대적용이 가능하다. 요즘 S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사극 『여인천하』는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