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오늘날 우리는 놀라운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변화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인터넷은 인간의 존재 양식을 뿌리 채 뒤흔들어 놓았고 세계화는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으려 하고 있다. 15세기에 서구는 새로운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과 정보의 유통에 혁명을 가져 왔었다. 그러나 오늘의 인터넷은 활자 매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이 변화의 여러 징후들 가운데서 특히 ‘세계화’의 현상에 주목하고 싶다. 하나로 연결된 범지구적 시스템은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 더 광범하게는 문화와 문화와의 만남을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인류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민족과 민족 간에, 문화와 문화 간에 다양하게 교류하며 교환하였다. 그 어떤 지리적 악조건도 이 교류를 가로막지 못하였다. 험한 산을 넘고 끝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뻗은 수천, 수만 킬로의 실크로드는 이 교류의 집념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교류는 제한된 것이었고 또 한시적이었다. 이것은 오늘의 상황에 비하면 단지 삽화적인 것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교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 울타리 안에 뒤섞여 어울리고 있다. 세계화는 무슨 명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며 우리는 이미 지구라는 한 마을 안에서 마치 ‘샐러드 볼’처럼 다른 민족, 다른 문화들과 뒤섞여 있다. 이런 처지에 외국문학의 수용을 말하는 것은 한가로운 일인 것만 같다. 외국문학 그리고 외국문화는 수용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그래서 우리의 지적 자산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실제로 미국의 베스트셀러는 몇 달도 되지 않아 우리말로 번역되는가 하면 할리우드 영화는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우리 나라에서 상영된다.

그러나 문학 또는 문자문화는 다른 예술이나 문화장르와는 다른 하나의 장벽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활동이나 스포츠경기는 그 어떤 촉매도 필요없이 직접적으로 교환되고 받아들여진다. 음과 색은 만인에게 공통된 감각적 언어이고 움직임과 힘도 육체의 자연적 속성이다. 그러나 문학은 말로 표현된 지적 구조물이고 말은 지역마다 민족마다 고유한 기호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먼저 암호나 다름없는 이 기호들의 해독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번역이 바로 이 작업에 해당된다.

사실 번역이 문제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류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다른 언어로 표현된 지적, 정신적 자산에 접근하기 위해 번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인들은 그리스어(‘코이네’)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그후 16세기 초에 루터는 이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번역은 인류의 지적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번역은 주로 근대화의 과정과 맞물려 있다. 과거 문화교류는 대체로 한자권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는 지적 엘리트 사이에 번역의 문제는 애당초 제기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구문명의 거센 공세 앞에서 우리는 세계를 향해 문호를 열고 서구의 선진기술과 지식을 도입함으로써 근대화의 대열에 뒤늦게나마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 근대화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다름아닌 번역이다.

나는 최근에 일본 근대화와 관련하여 번역의 문제를 다룬 글을 읽은 일이 있다. 이 글은 명치유신 이래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번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고찰하면서 번역이야말로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것은 16세기 프랑스의 젊은 플레이야드 시인들을 상기하게 한다. 이들은 프랑스의 새로운 문학,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보물을 훔쳐오는 ‘약탈자’로 자처하였다. 명치 초기의 일본 지식인들은 서구의 보물을 훔쳐오는 현대판 ‘약탈자’였으며 이 약탈의 수단이 바로 번역이었던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들보다 뒤늦게 시작하였고 또 서구와의 만남이 일본을 통과함으로써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본격적인 근대화는 해방 이후부터이며 때를 같이 하여 번역도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기능적 지식과 기술, 제도의 도입은 물론이려니와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 몇몇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한 것은 1950년대 말로 기억된다. 필자도 번역자의 한 사람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번역이 문학 작품에만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번역은 지식과 정보교류의 필수 불가결의 수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늘의 상황으로 돌아올까 한다. 우리는 위에서 인터넷과 세계화를 언급하였고 그것들이 야기한 한 경이적인 변화에 주목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정보의 범람이라는 현상이다. 지난날 우리는 조금은 한가하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식과 정보를 선택하며 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자유로운 개방과 교류의 시대에 모든 정보들은 아무런 검열없이 사방에서 밀려 들어와 우리의 삶을 포위하고 있다. 정보유통의 용이함과 가공할 속도가 마치 우리의 견제기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지성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 즉 판단과 선택의 기능을 환기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인터넷이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우려를 표명하며 그 안에서 인간자아가 매몰될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느 때나 수많은 의미와 가치들 속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주어진 정보가 적다고 해서 이 기능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엄청난 정보의 범람 속에서 그 어느때 보다 이 기능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확실하다. 인터넷에 대해 정보의 쓰레기장이라고 개탄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정보의 무한유통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자 도전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몫을 챙겨야 하고 우리의 체계를 창조해야 한다. 인간은 위기와 도전에 직면할 때 강해지고 그것을 극복한 것만큼 성숙해진다. 지금 세계는 고도의 판단력과 윤리성을 지닌(왜냐하면 판단에는 항상 지적 가치와 함께 윤리적 가치가 전제되므로) 새 인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외국문학의 수용도 위와 같은 문화적 상황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다. 우리는 과거 외국문학을 선택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더 가까히 다가선 외국문학에 대해 우리는 더욱 더 선택적이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또한 지난 날의 번역에 대해 반성의 기회도 된다. 과연 우리는 번역의 대상들을 선정하는데 있어 얼마만큼이나 합리적이었는가. 이 판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이 아닐까 싶다. 이 점 우리를 오류로 인도하는 두 개의 함정에 대해 항상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대중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센세이셔널리즘이다.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자극하고 감각에 호소하는 저급한 문화는 교류에 있어 항상 선두 자리를 차지한다. 지금 인터넷이 욕망과 감각의 추잡한 축제의 장으로 변해 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온갖 첨단기술이 마치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것은 저질의 쓰레기 문화이다. 이것은 개탄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연에 내맡겨진 인간은 타락으로 이끌려 가게 마련이다. 인간은 항상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자기를 다듬어나간다. 인간에게 고유한 자정(自淨)의 윤리적 프로세스는 언젠가 이 혼란과 환난을 극복하게 할 것이다(아니면 그 누군가가 말했듯이 인류에게 22세기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함정은 새로운 것의 매혹이다. 우리는 쉽게 새로운 것에 매료되고 시류에 휩쓸린다. 나 자신도 젊은 시절, 한때 전세계를 풍미했던 실존주의에 탐닉했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작품들에 빠져들어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번역하기도 했다. 사실 새로운 문학, 새로운 사조에 이끌리는 것은 그 자체 잘못된 일도 아니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외의 것들에 눈을 감아버리는 데 있다. 오늘의 모든 것은 어제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또 유구한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오늘의 문학, 오늘의 문화는 실은 표면 위에 떠오른 빙산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엄청나게 거대한 덩어리로 떠받쳐져 있다.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실재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동일한, 아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뿌리와도 같은 것이어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며 우리는 이 가운데 한 문학, 한 문화의 영원한 본질과 만날 것이다.

이 점 우리는 많은 아쉬움을 느낀다. 내가 관여한 프랑스어권의 경우 실존주의 이후 구조주의, 다시 해체론, 포스트 모더니즘 등 새 사조들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활발히 번역된데 반해 프랑스의 고전은 버려지다시피 하였다. 아직도 믿을 만한 『에세』(몽테뉴)의 번역도 없고 라블레의 번역도 없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비극작가 라신의 작품도 작년에야 겨우 그 초역(抄譯)이 나왔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외국문학에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문학 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서구의 문물에 접하고 정치적, 사회적 각종 제도를 도입한 지 반세기, 길게는 1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문명의 진수에 대해, 보편적 차원으로 확산된 서구적 가치들의 본질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정확하고 심도있게 인식하고 있는가.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되어 서로 어울리고 교환하도록 운명지어진 현 시점에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우리는 진지한 논의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문화 교류가 궁극적으로 문화의 본질들의 만남을 지향해야 한다면 이 교류에 있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명사적 안목이다(번역의 기술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다만 이 자리에서는 번역은 ‘제 2의 창조’라는 상투적인 그러나 자명한 명제에 나도 동의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그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