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기욱_번역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1957년생. 역서 『마틴 에덴』『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 등
영미 고전문학의 번역본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착잡한 심정이 된다. 우리가 그간 번역의 문화적 중요성에 둔감했던 탓에, 아직도 영미문학의 고전 번역본 대다수가 60년대 판본에 비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심지어 개악된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우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몇몇 뛰어난 번역본들이 나왔으니, 그 중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것은 강승영씨가 옮긴 소로(Henry D. Thoreau)의 『월든 Walden』(도서출판 이레, 1993)이다. 이 작품은 미국 초월주의 문학의 꽃이자 최초의 생태문학으로 일컬어지는 걸작이다. 특이한 것은 강승영씨가 미국문학을 전공한 학자도 전문번역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로지 『월든』의 감동을 한글 독자에게 전하고자, 그는 “미국 내의 수많은 도서관을 방문했으며, 번역 자체에도 1년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양쪽 언어에 대한 빼어난 감각과 탄탄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월든』의 유려한 문체와 그에 실린 힘찬 사유의 박동을 되살리긴 힘들다. 가령,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107쪽)고 토로할 때의 그 단호한 강렬함이나, 겨우내 언 땅이 봄기운에 녹는 모습을 보고 “대지가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으며 갓난아기의 손가락을 사방에 뻗치고 있다는 생각”(348쪽)을 갖는 소로의 순정한 마음을 이처럼 생생하게 옮겨놓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월든 호숫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소로의 순정한 내면풍경을 촘촘히 수놓듯 재현하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강승영씨의 『월든』에서 필자는 소로의 생태학적 사유와 근대적 의식이 빚어만든 언어의 장관(壯觀)을 목격하며, 원작 언어의 찬란한 빛을 되살리는 데 역자의 정성과 내공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감히 상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