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끝별_시인, 평론가. 1964년생.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 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등
조운(曺雲, 1900～?)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때가 아마 대학 4학년 때쯤이었으리라. 월북작가 및 시인들이 해금되기 이전이었던지라 정지용, 백석이라는 이름과 함께 조금은 은밀하고 비밀스런 분위기 속에서 전해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찌어찌 하여 정지용과 백석의 텍스트들은 복사물로 구해 볼 수 있었으나 조운의 텍스트들은 입소문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작년 가을 몇몇 시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조운이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다. 그의 시조집이 복간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이튿날, 1947년 초판본 『조운 시조집』과 그 이후에 발표된 시조 및 데뷔 무렵에 쓴 자유시를 모아 엮은 『조운 시조집』(작가, 2000년)을 읽을 수 있었다.
조운이 서얼로 태어났다던가, 24년 『조선문단』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자유시를 썼다던가, 이은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문재(文才)였다든가, 식민지 문학사관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민족 지식인이었다던가, 49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시조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과 놀라움에 대해, 감칠맛 나는 언어에서 비롯되는 현대적 시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단가들을 읽으면서 현대시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말끔히 씻을 수 있었던 그 미감(美感)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의 단가들은 먼저 언어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놀랍다. 불볕은 ‘호도독호독’ 내리쬐고(「菜松花」) 도라지는 ‘파라소름한’ 뜻으로 핀(「도라지꽃」)다. 미인의 살결처럼 쌓인 눈은 비단이 밟히는 양하여 소리조차 희고(「눈」) 언눈 밟히는 소리는 ‘빠스각 빠스스각’(「×月 ×日」)한다. 컴컴한 하늘에서 쏙쏙 빠지는 ‘사비약눈’(「×月 ×日」)이나 굴 까는 큰아기들의 ‘흥글흥글’(「法聖浦 十二景」)은 그려지기나 하는가? 그뿐 아니다. “봄비는 찰지다는데 질어 어이 왔는고 자네도 비를 맞아서 情이 치나 자랐네”(「비 맞고 찾아온 벗에게」)와 같은 절창의 구절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는 생략하고 압축함으로써, 의미를 살짝 감추고 풋풋한 풍경과 감각을 앞세워 놓곤 한다. 그 풍경과 감각이 삶과 존재의 깊이를 일순 관통하는 즐거움이란.
“서안(書案)을 대하여 옷깃을 바로하고 읽을 것이요, 외워 가지고 잔디밭이나 시냇가에 누워서 부를 것은 못된”(조운, 「병인년과 시조」)다는 육당의 시조 반대편에 그의 단가는 위치한다. 조운의 시조들은 오히려 서안을 제쳐두고 옷깃을 느슨하게 하고 잔디밭이나 시냇가에 누운 채 외워 부르는 게 제격이다. 그만큼 일상적이고 정감적이다.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손가락 모돠 쥐고/ 비비다 꼬다 못해// 질항을 버쩍 들어/ 메부치는 마음으로// 훤한 들 바라다 보며”(「時調 한 章」)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절창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도록 하는 순간들이 많다. “지는 꽃잎이/ 여윈 어깨를/ 툭 툭 툭 치며/ 흣듯는다// 홍두깨로 맞인들/ 이리도 아프리!// 봄아 가려면 가지/ 남은 왜 치며……”라는 「지는 꽃잎이」를 보라. 지는 봄꽃잎이 얼마나 사무치도록 아름다웠으면 홍두깨로 맞은 듯 아프다고 했을까. 그 아름다움을 토로하는 어조와 눈길은 사뭇 인간적이다.
“쥘상치 두손 받쳐/ 한입에 우겨 넣다// 희뜩/ 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 울 너머로 가더라.”(「상치쌈」). 이 시는 흔한 만큼 정겹기도 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한눈에 그려진다. ‘쥘상치’라는 언어도 돋보이지만, ‘희뜩’을 경계로 ‘한입에 우겨 넣는’ 현실과 울을 너머 훨훨 날아가 버리는 나비의 꿈을 접합시킨 촌철살인의 솜씨는 천의무봉에 가깝다.
눈에 관한 그의 시편들은 대개가 수작(秀作)들이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취향도 한몫을 한 결과일 것이다. “눈오고 개인 볕이/ 터지거라 비친 窓에// 落水물 떨어지는 그림자/ 지나가고// 와지끈/ 고드름 지는 소리/ 가끔 맘을 설레네”(「雪晴」). ‘터지거라’ 비치는 남도 햇살과, 그 햇살에 녹아 내리는 눈의 낙숫물 소리와 고드름이 떨어지는 소리를 언어화시키는 감각이 참으로 신선하다.
그는 분명 ‘자유시처럼 시조를 썼으며, 시조 속에 자유시를 담아놓고’ 있다. 우리말이 지니는 묘미를 한껏 살리면서 정감 어린 현대시적 정조를 되살리고 있다. 만약 조운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시조는 오늘보다 좀 더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조운이 우리 시사에서, 아니 현대시조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뜻일 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