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은 외국문학을 체계적으로 번역하여 국내 번역 문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99년부터 ‘외국문학 번역지원’ 사업을 시행해 오고 있다. 외국문학 번역지원 사업을 기획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문학적 의의는 있으나 난해하거나 상업성이 떨어져 번역되지 못했던 작품들을 발굴하여 번역, 소개하고 동시에 번역가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재단은 지원한 작품들을 국내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총서로 펴냄으로써 출판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독자들에게 수준높은 번역 문학을 선보이고자 하였다.
번역지원 사업 첫 해인 99년에는 모두 310명이 응모하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재단은 예상외로 지원자가 많아 예산을 급히 확충하여 서구의 중세 로망스부터 아랍어권의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당초 계획보다 많은 21건을 지원하였다.
이 지원작들 중에서 번역을 마친 『트리스트람 섄디 Tristram Shandy』(로렌스 스턴) 등 4종 6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 세계문학총서』로 첫 선을 보였다.
대산 세계문학총서는 심플한 디자인의 양장본으로 만들어 총서로서의 품격을 갖추는 동시에 독자들이 오래두고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표지에 장르를 표기하고 연번을 매겨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대산 세계문학총서는 이번 1차분 6권을 시작으로 앞으로 매달 1권씩 독자들을 찾아간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대하며 외국문학 번역지원 사업 운영위원을 대표하여 이인성(서울대 불문과) 교수가 쓴 ‘대산 세계문학총서 기획의 말’을 싣는다.
기획의 말
근대문학 100년을 넘어 새로운 세기가 펼쳐지고 있지만, 이 땅의 ‘세계문학’은 아직 너무도 초라하다. 몇몇 의미 있었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나태하고 편협한 지적 풍토와 빈곤한 번역․소개 여건 및 출판 역량으로 인해, 늘 읽어온 ‘간판’ 작품이 중간되거나 경제 논리에 의한 ‘상업주의적’ 작품만이 신간되는 등, 세계 문학의 수용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분명한 자각과 사명감이 절실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세계문학의 수용 문제는, 그 올바른 이해와 향유 없이, 다시 말해 세계문학과의 참다운 교류 없이 한국문학의 세계시민화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화적 성실성이나 책무, 그리고 그 질적 성숙와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이것은, 후미에 갇힌 우리의 좁은 존재 전망의 틀을 깨고 세계 전체를 통찰하는 눈으로 진정한 ‘문화적 이종교배’의 토양을 가꾸는 작업이며, 그럼으로써 인간적 삶의 심연을 더 깊게 탐색하기 위해 ‘미로의 실타래’를 푸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을 둘러볼 때, 그 실천을 위한 인문학적 토대는 어느 정도 갖추어진 듯이 보인다. 다양한 언어권의 다양한 영역에서 문학 전공자들이 고루 등장하여 굳은 전통이나 헛된 유행에 기대지 않고 나름의 가치 있는 작가와 작품을 파고들고 있으며, 독자들 또한 진부한 도식을 벗어나 풍요로운 문학적 체험을 원하고 있다. 새롭게 변화한 한국어의 질감 속에서 그 체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요청 역시 크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어쩌면 물적 토대 뿐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우리를 안타깝게 해왔다.
그런데 이제, 대산문화재단의 과감한 지원 사업과 문학과지성사의 출판을 통해 그 현실화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우리 문화계의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 의도에 걸맞은 참신하면서도 혁신적인 기획을 통해 기대에 부응토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떠맡아야 할 당연한 의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