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이문_시인, 평론가. 1930년생. 시집 『눈에 덮인 찰스 강변』 『나비의 꿈』, 평론집 『보이 지 않는 것의 그림자』 『사물의 언어』 등
언어는 도구로서만 생각되고 수단으로서만 사용된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 존재의 재현, 주관적 경험이나 의도의 표현, 그러한 내용의 타인에게의 전달 등의 수단이다. 그러나 언어는 도구이기 전에 대상 자체, 주관적 경험이나 의도 자체이다. “X” 혹은 “Y”라는 언어적 범주의 틀을 떠나서는 어떠한 객관적 존재, 어떠한 주관적 의식도 생각할 수 없다. ‘언어 이전의 세계’라는 말은 전혀 무의미하다. 이런 점에서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파악한 하이데거는 미흡하다. 언어는 곧 “존재/세계/경험/의식” 자체이다. ‘세계’는 의식된 즉 관념적 세계이며, 언어를 떠난 관념이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세계는 필연적으로 언어적 세계이며, 인간만이 언어적 동물인 이상,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역사 과정에서 인간만이 객관적 자연을 주관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는 관념화 즉 문화화할 수 있는 언어적 동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언어로서 관념화하기 이전의 세계는 무의미하지만 관념화된 세계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세계와는 논리적으로 동일할 수 없다. 관념화는 언어적 개념화를 의미하고, 이러한 개념화는 구체적인 세계의 언어적 추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의 관념화 즉 세계 인식은 세계의 언어적 조작 즉 세계 왜곡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만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세계를 밝혀주는 동시에 세계를 은폐한다 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계의 밝힘은 곧 세계의 은폐인 동시에 세계의 은폐는 곧 세계의 밝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구적으로 혹은 인식적으로 위와 같은 기능을 하는 언어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다.
언어는 인간에게 힘과 축복을 의미한다. 인간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 인과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초월하여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관념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로운 동물이 되었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비추어 자연을 언어적으로 개념화하고, 정복하여 통제함으로써 그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재료나 수단으로 삼아 보다 많은 힘을 발휘하고 물질적 부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의 역사는 곧 문명사이며, 문명사는 인간의 힘과 복지의 차원에서 발전의 역사이다.
그와 동시에 언어 사용 능력은 인간에게 소외와 저주를 의미한다. 언어적 개념화로 불가피하게 생겨난 물질과는 별개인 관념의 세계의 탄생, 자연과 별개의 문화 영역의 발생은 우주로부터의 인간의 이탈, 자연이라는 고향으로부터의 가출을 의미했고, 이러한 인간의 이탈과 가출은 정신적인 소외와 영적인 고독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우주라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의 몸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모태에서 떨어져서 세상에 막 태어난 신생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자유를 획득했지만, 그에게 그 자유는 홀로서기 즉 고독과 소외의 시작을 의미한다. 자유는 환희의 노래로 나타나지만 홀로서기 즉 소외는 진통의 통곡으로 바뀐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 목에서 나는 ‘응애응애’ 소리는 듣기에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난 데 대한 환희의 표현으로 들을 수도 있고, 반대로 통곡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한쪽만의 해석으로는 옳지 않다. 진실은 이 어린애의 ‘응애응애’ 소리의 참된 의미가 서로 갈등하는 두가지 인간으로서의 존재 상황의 표현이라는 데 있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어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동물인 동시에 문화적 동물로서의 인간인 것과 같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언어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며,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다.
도구적 언어의 이러한 내재적 갈등이 의식되는 장소에서 예술, 문학, 특히 시의 비도구적, 비유적으로 말해서 시적 언어가 싹트고, 자라고, 꽃을 피운다. 시적 언어는 도구적 언어가 동반하는 갈등, 더 근본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소외를 동반하지 않는 자유, 진통이 따르지 않는 환희를 가져올 수 있는 축제로서의 언어를 창조하는 데 있으며, 저주스럽지 않고 오로지 축복만일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의 가장 원초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언어를 창조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시는 언어의 궁극적 꿈이다.
문명사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도구화의 역사와 일치하고, 자연의 도구화는 성공적인 언어의 도구적 적용의 결과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도구가 아니며 인간은 자연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오늘날의 문명의 총체적 파국을 의식한다면 우리에게 도구적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를 가진 언어인 시적 글쓰기의 보존과 확대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