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꽃피는 나무조차 공포의 그림자를 모르는 채 꽃구경의 대상이 되는 순간에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죄없는 탄성조차도 터무니 없이 고약한 생존의 치욕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전율할 만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견디어내고, 부정성의 온전한 의식 속에서 보다 나은 세계의 가능성에 집착하는 냉철한 시선 속에서나 아름다움과 위안이 가까스로 존재한다. 온갖 종류의 순진함이나 충동성이나 자유분방함은 불신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태도에는 우세한 현실에 대한 순응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미국 망명 중에 씌어진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에 나오는 위 대목은 1944년에 쓴 것으로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는 유명한 말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이러한 생각이 똑같이 인구에 회자되는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와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김광규 역)

브레히트는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의 자발적 정지를 통해서 그 감동의 표현이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 현대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현대인의 난경을 노래하였다. 꽃피는 사과나무의 거역할 길 없는 매혹과 혹세무민의 폭력적 "엉터리 화가"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분노는 그러나 하필 아도르노나 브레히트의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강도에 있어서 다를 뿐 말짱한 의식이 그와 같은 상반되는 충동과 요구 앞에서 곤혹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정치적 야만주의가 번갈아 가면서 강산을 휩쓸고 지나간 20세기 한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지만 사랑이나 행복 뿐 아니라 불행이나 고뇌도 외적 혹은 내적 매개를 통해서 경험하고 내면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강렬히 의식하고 고뇌하는 것은 교양 체험의 결과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래저래 우리는 서정시 쓰기가 참으로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과연 쓰기만 힘든 것일까? 서정시의 수용과 음미는 과연 수월한 것일까? 현대는 서정시 쓰기가 어려운 시대인 그만큼 의심과 불신의 시대이기도 하다. 가령 현대인의 교양 체험에서 가장 큰 영향력으로 떠오르는 마르크스, 니체, 혹은 프로이트가 모두 '의심의 대가들'이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소여(所與)라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이 실은 개인들이나 공동체가 혹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의 결과이고 구성물이란 것을 그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폭로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작동을 폭로하고 프로이트는 성의 작동을 폭로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도덕의 기원과 그 작동을 폭로한다. 한 사회학자가 사회학의 기본충동으로 거론한 폭로의 모티프는 모든 인간과학의 기본적 충동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프에 향도되는 교양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19세기 고전소설의 과거시제의 작동이 폭로되고 역사도 허구와 사실상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폭로된다. 정치언어의 허위와 그 폐해에 항상적으로 노출되어 온 우리 사회에서 적정수준의 불신과 의심은 존명(存命)에 연관되는 생존기술의 하나가 되어 있다는 감회조차 안겨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정시의 진정성조차 의심과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브레히트를 읽고 공감한 독자들에게는 꽃구경의 대상이 되는 순간에 거짓말을 하는 꽃나무처럼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도 거짓말 덩어리로 비쳐지기가 십상이다. 이 또한 "고약한 생존의 치욕에 대한 변명"이 아니냐는 감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양시의 전통 속에 배치시켜 놓고 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완화삼(玩花衫)」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편으로는 억압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자발적으로 눈멀어 버리는 것이다. 동양 시의 전통 속에 앉혀 놓고 볼 때 이 작품은 해묵은 소재처리와 인생태도의 되풀이의 하나로서 근접해 온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도전적인 관점도 시에 대한 방법적 회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편안한 자세 속에서 우리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닌 전통적 심성과,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요구가 토박이 일상어의 세련된 조직을 통해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마련해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직업적 필요에서 얼마쯤 떨어져 있는 순종의 나그네는 의식하건 안하건 낯선 새 풍물과 경치와 지리의 순례자이며 편력자이다. 그는 한 지점에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마음먹은 대로 걸음과 자리를 옮긴다. 그 점에서 그는 낯선 새 풍경과 경험의 돈 후안이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아 다니는 나비와 같고 그런 의미에서 심미적 태도의 원형이기도 하다. 여행을 뜻하는 서구어의 옛뜻에 고역이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여행은 금리생활자들의 관광처럼 속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스러운 여행과 나그네가 보편적인 심성에 호소하는 것은 일상의 권태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의 이미지를 대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은 "고약한 생존의 치욕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치욕으로부터의 자발적 잠정적 탈출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가볍고 소소한 일은 아니다. 직업적 나그네와는 달리 보통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참여하고 잔류하면서 해방의 순간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의 난경은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을 생존의 치욕을 견디게 할 수 있는 매혹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와 세계의 향방에 대해서 관심하는 거대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가령 서정시의 시계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다. 인류와 세계의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이 불가피해 보일 때 특권적 순간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는 서정시는 무한이 가볍고 작아 보인다. 개인적 차원에서 볼 때 개개 인간의 거대서사는 우연한 탄생과 불가피한 죽음으로 구성되고 탕진된다. 그 거대서사의 윤곽만을 의식할 때 우리 삶의 구체와 세목은 하찮고 소소한 것이 되어 버린다. 탄생의 우연에서 시작하여 불가피한 종언으로 귀결되는 서사 윤곽의 잠정적 망각이나 의식으로부터의 퇴출 없이 우리의 일상생활은 영위될 수 없다. 우리는 종언이 없는 서사를 가정하면서 그러한 가정법 아래서 하루하루를 뜻깊은 것으로 만들어가며 의미를 찾아서 삶을 견디어낸다. 우리는 그러한 가정법을 결코 허망한 자기기만이라고 치부하지도 않는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으며 서정시가 하찮아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거대서사의 자발적 잠정적 망각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듯이 우리는 서정시를 위해 의심과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통해서 해방과 탈출의 특권적 순간을 누릴 수 있다. 서정시 쓰기가 힘든 시대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서정시가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괜찮은 것"이라는 쉴러의 말이 이제는 바보 같은 소리가 되었다고 아도르노는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위협이 초급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의 여유있는 발언이다. 죽음의 수용소 속에서였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서정시가 쓰기 힘든 시대는 절실히 그것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그것을 열렬히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의무일 것이다. 여기서의 서정시가 우리 현대시 고전의 독자없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인용해 본 청록파 흐름의 지나간 연대의 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광의의 시 일반을 가리키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