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암자로 올라가는 늦가을 산길엔 오후 한나절 투명한 햇빛 속에 드문드문 마지막 단풍잎이 지고 있었다. 본사 스님과 일행은 그 적요로운 계절의 조락(凋落)을 밟으며 암자에 이를 때까지 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폐사에 가까운 암자의 여린 여승이 내려준 공양녹차 한 잔에 흔치않이 그윽한 정화(淨化)를 느끼며 다시 그 길을 되돌아올 때도 여전히 말들이 없었다.

재작년 11월. 아내와 친지 내외가 함께 남녘 산골의 ㅂ사를 찾았을 때 속세의 인연이 있어온 그 절 스님 한 분이, 뒷산정 근처에 조용한 암자가 있으니 한 번 구경하고 가라며 길을 앞장서 나서준 바람에 그렇듯 청정한 한 해의 조락을 보내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왠지 그 산행의 기억이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그 산길의 투명하고 고즈넉한 조락의 빛 뿐 아니라, 애처롭도록 가녀린 체구에 앳되고 맑은 얼굴을 한 그 비구니의 정결스런 민둥머리 모습하며, 뽀얗게 밝은 내실 문창지 빛 속에 다소곳이 차를 내리던 그녀의 그윽한 모습들이 이따금 눈앞에 선했다. 그중에도 내가 그 암자 뒤꼍 댓돌 위에 늘여 세운 산란(山蘭)들의 수줍은 꽃몽오리에 끌리는 것을 보고 대뜸 ‘한 포기 가져다 기르실래요?’ 물으면서 얼굴 가득 번져가던 그 해맑은 웃음기가 유난히 더 눈앞에 선연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새삼 내 심신의 삽상한 정화를 느끼며 생각을 가다듬곤 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가 봐야지.

지난 10월 ㄷ재단에서 시행 중인 한 문학상 후보작 중에 이윤기씨의 창작집 『두물머리』가 끼여 있었다. 그런데 그 작품집 중 「세 동무」란 단편을 읽다 보니, 이야기가 펼쳐지는 암자의 분위기나 옛 친구의 누이동생으로 되어 있는 그곳 여승의 인상이 어딘지 그 ㅂ사 뒷산 암자행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산사의 분위기는 어디나 늘 비슷한 데가 있고, 길깊은 암자의 수행자들 또한 속인들에게는 늘 비슷한 상상과 느낌을 부르게 마련. 나는 물론 그것이 그 암자 그 여승 이야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 「세 동무」 이야기가 내겐 워낙 절창으로 읽힌데다, 이윤기씨는 20여년 전 내가 그의 등단작품을 심사한 인연도 있고 하여, 그가 수상자로 결정된 것을 남달리 기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의 「세 동무」로 인해 다시 한 번 그 ㅂ사 뒷산정께의 암자를 떠올리며 남행길을 벼르던 중 그렁저렁 먼저 시상식날을 맞아서였다. …… 23년 전 이 아무개가 신춘문예에서 나를 뽑아주었는데, 오늘 다시 그의 심사를 거쳐 이 상을 받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그는 이미 전백(全白)의 머리로 저기 앉아 있고 나도 이젠 반백이 되었는데, 이번 수상작품이 다소나마 그의 마음에 들어 이 오래고 깊은 인연의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의 말 가운데에 그가 짐짓 내게 그런 알은쳇 소리를 하였다. ―「세 동무」를 보니 넘치고 남데 그려. 나도 물론 속으로 그런 화답을 보냈음은 당연지사.

그런데 수상식이 끝나고 둘이 다시 따로 만나 거듭 축하를 건넨 자리에서였다.

― 다른 작품들도 좋지만, 「세 동무」는 특히 절창입디다. 그런데 그 암자나 비구니 이야기는 나도 비슷한 데를 한 곳 알고 있는데, 그 암자는 어느 산 절이오?

― 그 암자가 어딘데요?

내 덧붙임 물음에 이번엔 그가 되물었다.

― 남녘 ㅂ사 뒷산정께요.

― 거길 가 보았어요?

― 한 번 가보았지요.

― 바로 거기에요. 그 절, 그 암자!

아, 거기서 이윤기와 함께 그 여승을 그렇게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만남들이 숨어 기다리는 우리 삶의 아름다움이라니. 그리고 그런 고운 인연과 만남의 자리를 찾아 열어주는 문학의 품이라니! 알고 보면,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은 한 사내가 그 적막한 산사로 옛 친구의 누이였던 비구니를 찾아가, 때마침 그녀를 찾아온 카톨릭 수녀 친구와 셋이 함께 오래 잊혀져온 우리 가곡 ‘세 동무’의 창연스런 가사를 밤새워 불러대는 소설의 이야기 역시 지치고 외로운 우리 삶과 영혼들의 따뜻한 만남과 위로의 자리가 아니던가. 그래 나는 오늘 다시 그날 밤 세 영혼의 절절한 합창에 마음을 끼어앉아 그 ‘세 동무’의 그윽한 삶의 동행, 그립고 아름다운 영혼들의 행로를 함께 뒤쫓아 본다.

지나간 그 옛날 푸른 잔디에 / 꿈을 꾸던 그 시절이 언제이던가 / 서녘 하늘 해지고 날은 저물어 / 나그네의 갈 길이 아득하오 / 즐거웁던 그 노래도 설운 눈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