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튀빙엔 대학 한국학과의 한국어 교육 담당자로서 한국 문학 작품 독해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대산문화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지원 사업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하면 좋은 기회가 될 듯 싶었다. 주번역자와 공동번역자 두 사람이면 조건이 갖추어지지만 학생들에게 기회를 좀 더 부여하고자 한 사람을 추가했다. 당시 박사과정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성취동기가 유달리 강한 우수한 여학생 둘을 불러 의견을 타진했는데, 새로운 과제에 대한 기대로 눈을 반짝이는 게 두 말할 것 없이 예스였다.

우선 작품 선정의 기준을 놓고 토론을 한 결과 첫째, 문학 장르는 시적 감각과 독특한 시어 등을 요구하는 시, 다뤄 본 적이 거의 없는 희곡 등을 제외, 대체적으로 무난한 장편소설로 하고 둘째, 번역자가 모두 여성이니까 여성작가의 작품을 우선으로 하며 셋째, 독일 독자들에게 너무 생소하여 첫눈에 거부감을 주는 것보다는 한국적이면서도 그들에게 친근한 주제를 다룬 작품을 고르기로 했다. 그런데 번역하고 싶었던 유명한 여류작가들의 장편소설들은 이미 번역이 됐거나 번역 중인 상태여서 소설의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대산문화재단에서 선정한 작품목록에 나와 있는 소설 중에 마침 한국학과 도서실에 비치되어 있는 소설들을 섭렵하다가, 볼거리가 없던 시절에 전성기를 누리다가 현대 산업화 과정에서 고도로 발전하는 영상기술에 밀려 도태되고 몰락해 가는 한 서커스단의 운명과 그 단원들의 애환을 그린 한수산의 『부초』가 선택 선상에 올랐다. 독일에는 아직도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서커스단이 일년에 한두 번은 각 도시에서 순회 공연을 하고 있는 터라 이 주제는 독일인에게 퍽 낯이 익고 서커스 단원들의 생활은 한국적인 요소를 다분히 간직하고 있어 미지의 한국 서커스에 대한 독일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창작이냐 번역이냐로 고뇌하는 게 번역작업에 내재한 문제라고 번역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창작이라고 해서 내용을 원작과 다르게 한다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간결하고 딱딱한 원작의 문장이라도 번역 과정에서 유려한 문장으로 탈바꿈하여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단어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직역으로는 원작의 언어와 번역어가 동양과 서양언어인 경우 언어 구조상 차이에서 오거나 각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의 차이에 기인한 생소한 표현 등의 처리가 불가능하여 의역(意譯)이 요구되는데 어느 정도로 그 범위를 허용할 것인가는 번역자 개인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다.

직역과 의역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가를 놓고 공동번역자들과 설왕설래하며 명쾌한 결론을 얻지 못하다가, 직역이 어려운 문장은 풀어서라도 충실히 번역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번역된 작품에 대한 한 심사평에 동감하고 번역작업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작가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 문학작품에서는 한 단어나 표현이 몇 문장 사이를 두고 자주 반복된다. 반복을 꺼리는 것이 독어 문장의 관행인지라 똑같은 원작의 단어나 구절들을 동의이어(同意異語)로 번갈아 가며 번역해 놓는 것이 결코 단순한 작업은 아니었다. 작품을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려고 한 단어도 빼놓지 않고 번역하려니 어줍은 표현들이 속출했지만 독일 언어 습관대로 고치기를 극히 제한하고 지나친 창작이라는 평을 듣지 않게 혹은 한국언어의 특성을 돋보이게 하자는 의도로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지만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번역작업 중 특히 시간과 신경 소모가 가장 많았던 부분은 한국에만 있고 독일에 없는 현상이나 사물 등을 대할 때였다. 예를 들어 “사돈 남 말하네”라는 문구에서 전통적으로 독일에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에 고유한 “사돈”이라는 친인척 호칭이 발목을 잡는다. 궁여지책으로 발음에 따라 “Sadon”으로 옮겨 놓고 “사돈이란 혼인으로 맺어진 두 집안 부모끼리 또는 … 부르는 호칭이다”라는 주석을 붙여 놓았지만 마음이 개운할 리가 없다. 또 “마루 밑에 웅크리고 있는 개”라는 표현에서 “마루”를 “베란다”로 옮겨 놓고 보니 독일의 베란다 밑에는 개가 들어 갈 공간이 없는 것이다. 독일 독자가 얼마나 아리송해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나무로 된 벤치”로 과감하게 단어를 바꾸어 놓고 원작을 훼손한 것같이 죄스런 마음이 되기도 했다. 이런 경우 번역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우울한데다가, 번역 후 심사에서 궁색한 번역이라거나 잘못된 번역이라고 혹평을 받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겹쳐 스트레스가 이중으로 쌓이는 것이다. 특히 서커스 단원들이 사용하는 거친 언어라든가 깡패들과 싸울 때 내뱉던 상스런 욕설을 옮길 때는 얼마나 고역이었던지. 독일 생활을 날품팔이 공사장이나 노동자들 틈에 끼어 한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기회에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는 독어의 상스런 표현을 총동원해서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번역을 해 놓으면 어떤 단어는 상스럽기는 해도 독기(毒氣)나 악의보다는 익살이 더 많이 들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공동 번역자들한테서 정정 요구가 들어오기도 했다. 욕설 사전이 있어야겠다고 입을 모았지만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는 상말을 동원해서 그럭저럭 상황에 맞게 욕설을 처리를 했다. 그러나 모든 상식과 여러 종류의 사전을 동원해도 해결이 안되는 서커스 단원들이 쓰는 몇몇 은어와 전문용어는 잠시 귀국하게 됐을 때 원작자를 만나 해답을 들어 해결하기도 했다.

번역이 끝나고 출판사를 찾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아시아문학 특히 한국문학에 대한 독일 독자들의 관심이 독일문학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게 적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유명 출판사들은 이런 현상을 익히 파악하고 있어서 출판 의뢰를 외면하기가 일쑤다. 내로라하는 출판사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예상대로 거절이었다. 우리의 거듭된 헛된 노력이 재단에 보고되었고 재단으로부터 한국문학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던 독일의 펜드라곤이라는 출판사를 추천 받아 출판이 결정됨으로써 출판사 찾기 오딧세이를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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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편을 알리는 아나운스먼트가 대합실 쪽에서 웅웅거리며 들려 왔다. 하명은 벽 위쪽으로 열려진 창문을 쳐다보았다. 물빛 하늘이 네모지게 오려져서 거기 걸려 있었다. 구름도 없이 한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이었다. 순간 가슴에 걸린 현(弦) 하나가 퉁 하고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칠룡아, 네가 피에로 하는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냐. 가만히 보면 단체에 들어와서 처음 무대에 설 때엔 누구나 피에로부터 시작해, 그렇지? 그런데 늙어서 재주 못하게 될 때 곡예사는 또 피에로를 하더구나. 이제 생각해 보면, 우리 한세상 왔다 가는 것도 손님들이 실없이 웃으며 온갖 바보짓이나 골라 하는 네 꼴을 보고 앉았다가 옷 털고 돌아가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냐. (『부초 外(한국소설문학대계 71)』, 동아출판사, p. 290)

Die Ansage der Busnummern und der Reiseziele drang surrend aus der Wartehalle. Hamyong blickte auf das geöffnete Fenster oben an der Wand. Der Himmel im Fenster sah aus, als hätte man ein blaues Viereck ausgeschnitten und an die Wand gehängt. Hamyong glaubte, eine Saite in seiner Brust dumpf erklingen zu hören. Er sprachin Gedanken zu Chillyong: “Weißt du, woran ich dachte, als ich dich den Clown spielen sah? Alle Artisten beginnen ihre Karriere als Clown, stimmt’s? Und wenn sie zu alt sind für Akrobatik, spielen sie wieder den Clown. Das menschliche Leben von der Geburt bis zum Tod gleicht diesem Vorgang. Die Zuschauer sitzen da und schauen dem zu, der blödsinnig lacht und allerlei dumme Streiche spielt. Danach klopfen sie ihre Kleidung ab und gehen" (『Ende einer Vorstellung』, p.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