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춘진_서울대 서문과 교수. 1955년생. 저서 『보르헤스』『스페인 피카레스크 소설』 등
우리 시가 스페인어로 소개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서정주, 김춘수 등의 시가 번역된 것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은 시의 번역은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우리 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한결 확장시켜줄 것으로 기대된다. 고은의 시가 해방 이후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큰 줄기이자 세기 후반 격동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고은의 시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와 고뇌를 아우르고 토로한다는 점에서 언어가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렇게 낯설지 않을 법하다. 허무에서 출발하여 삶을 지탱하는 의미를 천착하려는 실존적 갈증, 자아에 대한 숭고한 믿음을 견고히 지탱하려는 나르시즘, 자유를 갈구하고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는 이념 등은 험난한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그들에게도 우리 못지 않게 체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시적 메시지들인 것이다. 더군다나 역사의 선진 대열에 서기보다는 개발도상국 또는 제 3세계의 그늘진 역사와 사회적 전통을 공유해왔다는 점에서도 중남미의 독자들은 우리와 공감하는 바 클 것이다.
이를테면 계엄 하에 짓밟힌 80년 광주항쟁을 노래한 「오월이 가면 Si se olvida mayo」은 독재에 항거하는 분노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스페인어로도 유감없이 강렬하고도 절박한 이미지로 전달되고 있으며 시대를 갈구하는 애끓는 염원이 절절하게 옮겨져 있다. 독재에 대한 항거에 익숙해져 있는 중남미인들에게 고은의 역사적 문제의식과 정의의 시구들은 사무칠만한 절규로 들릴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금남로의 상징성은 Kumnam-no와 망월동 Mangwol-dong이라는 고유명사로 과연 어떻게 전달되고 있을까? (금남로와는 달리 망월동에 관해서는 80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숨진 이들의 묘지라는 주해가 달려 있다.) 양평의 20사단, 7공수여단 등을 옮겨놓은 스페인어들은 어떤 시적 효과를 전달하고 있을까? 그리고 ‘mayo(오월)’는 과연 원시(原詩)의 이미지와 함의를 어떻게 전달하고 있을까? 역사적 정황을 달리하는 수용자들에게 어떤 시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번역자에게도 지대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번역의 한계는 『Fuente en llamas』의 많은 시어들에서, 운율에서 상징과 비유의 전이과정에서 수없이 드러난다. 사실, 시란 이념과 의미의 전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고은의 시가 스페인어로 번역되는 것이 주제와 내용의 전달을 위한 것이라면, 그래서 스페인이나 중남미인들에게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는 보편적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것이라면, 구태여 번역의 노력이 새삼 필요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각기 제나라 말로 씌어진 수많은 시들로도 족할 것이니 말이다. 고은 시의 번역은 우리들의 영혼과 정서를 시적 체험을 통해 전달시킬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자의 주관성 개입이 불가피하게 자의적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창조적 수용을 유도하도록 하는 번역자의 배려가 요구된다. 스페인 시의 율격 체계는 우리 시의 율격과 틀이 다르다. 우리 시의 운율이 장단 위주의 간결 구조라면 스페인 시의 전통은 다채로운 율격을 발달시켜왔으니 우리 시를 서양 시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 어려움을 장애물이 아니라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는 지름길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서성철과 온타뇬 데 로페(Ontañon de Lope)의 번역은 그러한 감성적이고 창조적인 번역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불교를 통한 종교적 구원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맞섬 사이에서 시를 지탱시켜온 긴장을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전달하게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은 시에 깊고 넓게 배어있는 한국적 전통의 한과 시적 정서가 스페인어의 풍요로운 율격과 함축성에 담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로벌 사회는 단순히 미국문화의 주류화나 보편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로벌 문화가 지방문화 위에 군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문화가 국제화 되어 가는 전기이기도 하다. 고은 시의 번역이 우리와 스페인어권 독자들 사이에 문화적 교량이 되고 우리 문학의 글로벌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50년대에서 20세기말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한반도 역사가 응어리져 있는 고은의 시에서 글로벌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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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義마을에 가서
겨울 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小白山脈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正義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고은 시전집 Ⅰ』, 민음사, p. 346)
EN LA ALDEA MUNUI
En invierno fui a Munui y vi
como apenas se topaba el camino que me condujo alli
con los caminos bifurcados.
La muerte desea que el camino de este mundo
sea sagrado igual que ella misma.
Cada uno de los caminos se extiende
hacia la cordillera fria de Sobaek
prestando sus oidos cada vez que suenan secamente.
Pero la vida de la aldea, alejada del camino,
esta sumergida en lo mundano de la riqueza
y vuelan las cenizas en la aldea dormida.
De repente, miro las montanas, parado,
cruzando las manos con paciencia
y las lejanas montanas se van acercando cada vez mas
Nieve!
Tu tendras algo mas que cubrir salvo la muerte?
En invierno fui a Munui y vi
como la muerte abraza la vida y acoge con fuerza
la muerte en la tumba.
Hasta el fin, tolerante, tolerante,
la muerte oye la senal del mundo
y se vuelve atras, retirandose.
Todas las cosas descienden como si fueran
lotos del verano pasado y justicia rigurosa.
Asimismo, la nieve va cayendo en el mundo.
Aunque tires piedras, jamas podras acertarle a la muerte.
La aldea de Munui en invierno!
Crees que todos nosotros estaremos cubiertos de ni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