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한국을 떠나 이십 년 가까이 미국에서 생활해온 사람이 있다. 그는 이십 년 동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뉴욕 변두리의 골방에서 그림을 그려왔다. 5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이 떠날 때의 언어를 그대로 구사하는 걸 보고 놀랐다. 그는 한마디로 ‘1970년대 한국 서울 말의 보물창고’였다. 청년 시절에 한국을 떠난 그는 이십 년 전 청년이 쓰던 속어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날나리 날사탕, 쪼갠다(웃는다), 찍 쌌다(낭패하다)…… 그를 만난 기념으로 그런 어휘가 알사탕처럼 박혀 있는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 쓰지 못했다.

그런 그가 보름 전쯤에 잠깐 다니러 왔다. 만난 때가 점심 전이어서 무엇을 먹을까 물었더니 그는 한국에서는 사람끼리 만나면 으레 밥을 먹느냐고 신기해 했다. 나는 부근에서 꽤나 유명한 보리밥집으로 차를 몰았다. 일대에 허다한 보리밥집 가운데 원조로 알고 있는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보리밥집으로 들어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보리밥집이 만원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그는 여직 입구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종업원은 우리에게 무조건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우리가 망설이는 동안 종업원의 예언대로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몰려나왔다. 종업원은 치우지 않은 자리에 우리를 데려가 앉게 했다. 그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 실내를 살피면서도 궁금증을 참는 눈치였다.

상을 치우고 나자 곧 밑반찬이 왔고 종업원은 “2인분이죠?” 하고는 대답을 듣지 않고 돌아서 갔다. 여느 식당과 다름없이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고 아이들은 식탁 사이를 누비면서 뛰놀았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차에서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즐거워하는 그의 어법, 어휘의 섬세하고 정겨운 면모는 식당의 시끄러운 분위기 때문에 대폭 줄어들었다.

하여튼 밥이 왔고, 그는 옛날 맛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며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뜨거운 숭늉이 왔다. 우리는 그 숭늉을 먹으며 식당의 분위기에 맞춰 ‘추억과 향수(鄕愁)의 상품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곧 종업원이 다가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 먹었으면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왜요?”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종업원은 그런 질문은 처음 받은 듯 황당한 얼굴을 하더니 돌아서 가버렸다. 나는 한국에서 그보다 오래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에게 무엇인가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한국의 식당 주인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한솥밥을 함께 나눠먹는 식구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흉허물 없이 대하는 것이다. 식구라면 다른 식구가 자리나기를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식구끼리이므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도 용인할 수 있고 텔레비전이 왕왕거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사람을 만나면 밥부터 먹는 한국의 풍습에 익숙해졌던 모양이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면 철저하게 식구 대접을 하는 한국식 관습에도 익숙해져야 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꽤나 힘들었던지 출국하기 하루 전날, 그는 내게 전화를 했다.

“야, 나 지금 굉장히 유명하다는 추어탕 집에 와 있걸랑. 오늘은 식구 대접을 받지 않아도 되겠어. 손님 대접을 받을 거라구. 내가 얼마나 확실하게 대접받는지 두고 봐.”

나는 그에게 그 식당의 위치와 이름을 물었다. 그 식당은 손님이 줄서서 기다리고도 못 먹는 수가 많은, 한국 최고의 식당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그에게 식당 앞에서 줄서서 기다렸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랬다고 했다. 미국에서처럼 처음부터 손님 대접을 받아서 용기가 났는지도 몰랐다. “형, 그렇지 않을 걸. 대한민국에서 유명하다는 건 식구 대접을 철저하게 한다는 뜻이거든. 여기서는 한국식으로 먹고 미국 가면 미국식으로 먹으라구.”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고야 말겠다고 했다. 나는 손님 대접을 받거든 기념으로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사족. 한국에서는 소설도 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가끔 내가 밥통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