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유자나무 한 그루 가져갈래? 하시길래 좋죠, 했다. 선생은 일어나셔서 베란다 저 안쪽에서 유자나무 분을 들어다가 입구에 내려 놓으셨다. 바깥 창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시원한 바람이 들이치면 제법 수런거릴 듯한 잎들은 오월 말의 그, 꽃빛들 다 물리쳐 보낸 후의 바로 그 초록이었다. 이제부터는 그 잎들이 아주 이쁘지는 않다. 모든 이쁨은 아기 때의 것이다. 충북 영동이 지끔껏 4년여 동안 선생이 사시는 덴데 그 산천의 빛이 또한 그랬다. 이제 이쁘지는 않다. 시퍼렇게 짙어서 깊어지고, 그 깊이에 어둠을 더해서는 무섭기까지 한 그런 빛이 될 것이다. 금강 상류인 호탄천을 건너야 선생이 기거하는 데에 닿는데 그 물도 가뭄 때문에 야위었다.

유자나뭇잎의 빛깔들을 보면서 잠깐 그런 생각이 났다. 벌써 몇 년 전인가. 선생님과 무슨 일 때문이었던지 선생의 고향인 목포 일대를 다녔었다. 유달산의 어느 기슭에서 나는 처음 보는 아주 이쁘게 생긴 담쟁이 넝쿨을 캤다. 선생님도 하나를 같이 캐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 우리가 좀 떨어져 있더라도 이놈을 보면 되겠다, 너는 서울서 보고 나는 영동서 보고. 추사에 대한 말씀도 보태신 것 같은데 내가 추사를 잘 모르므로 기억할 방법이 없었다. 그 식물을 담 밑에 묻고는 열심히 물을 뿌리곤 하였는데 다음 해 봄이 지나도 싹이 나지 않았다. 아랫녘에만 자생하는 식물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더 선생의 그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그 담쟁이 식물은 지금 없지만 선생께서 건넨 그 말씀이 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는 것이다. 선생께서는 그 말씀을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그때 기억이 나시느냐고 되묻지 않았지만 또 식물을 주시려 하는 것으로써 짐작할 뿐이다. 이번에는 아예 튼튼하게 가꾸어서 그렇게 하신다. 물론 이번에 주시는 식물도 아랫녘 식물이다. 이 식물이 또 다음해 봄이 되어 잎을 내밀지 못하더라도 선생은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분이니까. 또 나에 대해서도 으레 그런 사람으로 여기고 계실 테니까.

영동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산이 또 산을 숨기고, 내보이고 하는 그런 장소다. 벌써 영동에 오신 지가 만 4년이 넘었다. 선생에게 영동의 장소성이라고 할까? 지리적 감각이라고 할까? 그것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은 시에 대한 생각과도 연결되지 않겠는가.

시간과 장소가 함께 호흡하는 곳, 영동

- 이곳이 특별히 어떤 지역이어서가 아니고 자연과 비교적 밀착되어 있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시간과 장소가 동시에 같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내 삶에서의 그동안의 궤적과는 다른, 공간적으로는 축소되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시간적으로는 깊이 확대된, 시간과 장소를 호흡하며 함께 한 어떤 의미로 파악되어져. 요 몇 년 전인가 거제 앞바다엘 다녀올 기회가 있어서 거기 바닷가에서 오랜 만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동안 너무 오래 시에 대한 질문을 버리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60년대 초 목포 바닷가를 늘 시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하면서, 결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결론을 유보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면서, 또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던 모습이 다시 참으로 오랜만에 떠오르더라. 그러나 그 질문에 답을 구하고 다시 그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즈음은 시에 대한 의문도 없고 해답도 없고 공기처럼 호흡하면서 시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것 같다. 이곳에서 보는 것은 늘 자연인데 그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욕해지게 마련이다. 시의 구경을 통과하고 나면 어떤 세계가 나타나는가. 나무와 새와 들판의 세계를 요약한 그런 세계가 아닌가. 시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 시와의 경계가 사라졌다. 최소한 희미해졌다. 어떻게 보면 시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대단한 무엇도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그 경계는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적적하진 않으셨을까.

- 처음 한 2년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롭고 적적했지. 무엇보다 아무와도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힘이 들고 지치게 한 셈이지. 늘 말을 하고 말을 다루던 사람이 말야.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어.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호흡해버리는 방법뿐이지. 이 인근에 내 발길이 닿지 않은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을 거야. 산을 보고 물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고 가장 많은 일이었지. 그렇게 2년쯤 지나니까. 적응이 되면서 건강은 회복되었고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부대낌에서 놓여나서 시간의 얼굴들을 느끼고 호흡할 수 있었던 게 이곳에서의 내 수확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

풍경 뒤의 풍경

선생은 삼 년 전에 이곳에서 시집을 한 권(『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탈고하셨다. 그것은 물론 온전히 이곳에서의 소출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공간과 시간의 느낌이 어느 정도 파동치는 그런 시집이었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인생의 큰 구비를 구부러져 넘어간 세계의 느낌이 감동스럽게 제시된 시집이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시집(시집 제목에 대한 제자의 의견을 요구하셨다. ‘풍경 뒤의 풍경’이 좋은가 ‘멀리 보이는 집’이 좋은가. 전자는 내용상으로는 잘 맞지만 너무 드러난 것이 아닌가. 후자가 훨씬 소박하게 느껴지는데 당연히 후자로 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의 의견은 당연히 앞쪽이라서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제 의견도 앞쪽이라고 말씀드렸다)이 탈고 되어 나올 것이다. 이 시집은 이곳에서 생활하시면서 쓰신 시들이다. 물론 하나의 시집에 어떤 울타리를 쳐서는 안 될 일이지만 선생님의 문학적 궤적으로서의 이곳은 이제 아주 중요한 지리적 장소가 되는 셈이다(옛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아무리 풍광이 뛰어나더라도 그곳에 인물이 없다면 명소가 될 수 없다).

나는 선생이 이곳에 오래 머무시는 것에 반대였고 여러 차례 의견도 말씀드린 바 있었는데, 왜냐하면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우선 선생님의 말씀을, 지식을, 지혜를 찾아오는 사람만이 달랑 듣고 가기엔 너무 아깝고 아쉬웠던 것이다(사담이 되겠지만 내가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가까운 대학 어디에서든 선생님의 강좌를 개설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의 문화를 위해서도, 또 이 지역의 이름을 위해서도 그 대학의 앞날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 출신을 자기 고장 사람으로 대접해 맞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헌데 선생님은 기왕에 이 지역에 머물고 계신 분인데…… 하는 주제 넘는 생각이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들었다. 영동이란 이름이 시인 최하림이란 이름과 더불어 그렇게 여러 번 유력한 매체에 소개되었건만……). 헌데 이번에 선생님의 새로운 의견이 나왔다. 건강이 좋아져서 웬만한 일은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딸들이 살고 있는 서울과 가까운 양수리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라고 하신다. 서울 사는 제자된 입장에선 입이 찢어질 일이지만 못내 이 고장의 사람들이 아쉽고 아쉽다.

일생의 빚이었던 ‘김수영 평전’ 마무리

- 그동안 일생의 빚이었던 ‘김수영 평전’을 온전하게 마무리 해서 넘기니 참 홀가분하다. 그토록 문제적인 시인의 노모와의 인터뷰 자료나 여러 실제적 증언들을 이제는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셈인데, 그분들은 다 돌아가시고 해서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았었다. 전의 ‘김수영 평전’에서는 다루지 못한 부분도 많아 이번에 새롭게 정리를 해서 넘긴 셈이지. 얼마나 오랜 만에 집중을 했던지 힘들었어.

모든 김수영 연구에서 선생님의 평전은 가장 밑자리를 차지하는, 그리고 가장 윗자리까지 자장(磁場)을 형성하는 중요한 문건이 되는 셈인데 얼마 전에 새롭게 정리를 끝내고 출판사에 넘기셨다고 한다.

- 포로수용소에 함께 있던 한 분을 인터뷰 했는데 그분 자신의 행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김수영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더라. 새까만 어둠 속에 아무 말을 해서는 되지 않는 산길을 가는데 앞 사람의 뒷통수를 놓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해서 이어지고 그 모진 역사의 격류 위에 김수영도 크게 다르지 않게 있었던 셈이지. 그것이 김수영의 모든 공부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면 아주 험한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나와야만 도원에 이르거든. 그것은 어쩌면 조선 초기의 우리 선조들의 내면과 지금의 역사의 꼴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는 셈이야. 김수영도 그런 길을 걷다가 사라진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그 길 자체가 문제고 아름다움이지.

안견의 그 그림의 어느 외진 변두리라고 해도 될 강가에서 선생님과 나는 가끔 눈길을 마주치며 차를 마시고 물빛을 바라보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몇 마디씩 나누고 그랬다. 조금은 걷고 서성이기도 하고. 강의 물길은 여울을 만들고 여울 위에 빛을 실었다. 그 빛을 산그림자가 얼만큼은 가져가고……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시는 그저 저런 빛이고 그림자고 그 시간이고 한 것이었다. 자연은 크게 보면 잔인한 대상이지만 그러나 작게 보면 말이고 얼굴인 것이다.

또 못내 하룻밤도 선생님 곁에서 머물지 못하고 세속의 일로 휑하니 올라와버리고 말았다. 헌데 아차. 유자나무를 그냥 두고 왔다. 선생님도 댁으로 올라가서 혀를 차셨을 것이다. 나는 유자나무를 가지러 곧 영동에 가야 한다. 어디 그 유자나무가 유자나무일 뿐이랴. 이미 아름다운 어떤 상징이 되어서 내면에서는 수런거리는 그 무엇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