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했던 1980년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헌걸찬 투쟁 덕택에 우리는 극소수 정치인들의 손아귀에서 희롱당하던 정치권력을 조금이나마 나눠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개명한 2000년대, 이 땅의 학문 민주화는 정치 민주화의 여정 만큼이나, 혹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멀고 험해 보인다. 그만큼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학문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로라 하는 대가급 학자들은 청기와 장수처럼, 혹은 지난날의 위정자들처럼 온갖 진리와 아름다움을 한손에 움켜쥐고 원전(原典)의 울타리 안에 들어앉아 자기들만의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을 뿐, 그 진리와 미(美)와 즐거움을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수하는 일에는 게으르고 인색하다. 86년 출판사 설립 이래 번역을 통한 외국문학 소개의 한 길을 달려온 ‘도서출판 열린책들’의 홍지웅 사장을 이같은 학문과 예술의 독점화에 저항하는 우리 시대의 ‘민주열사’라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러나 파트리크 쥐스킨트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처럼 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책들에서부터 ‘마야코프스키 전집’, ‘프로이트 전집’, ‘푸슈킨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같은 한국적 출판 현실에서는 거의 무모하다 싶을만한 대규모 시리즈물에 이르기까지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도서들의 면면은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어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다.
평창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출판사에서 만나본 홍지웅 사장에게서는 이같은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번역은 우리 문화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한국문학은 기왕에 이를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들이 많이 있으니 이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제대로 된 외국문학을 펴내겠다는 각오로 출판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 낸 책들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누가 이런 수준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우리 책들에서도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는 우리나라 번역문학계의 전반적인 수준 탓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근자에 ‘열린책들’의 이름을 세간에 드높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출판 과정을 보면 홍 사장의 이같은 자신감이 단순한 허풍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광고비를 뺀 순수 제작비만 3억8천여만원이 든 이 25권짜리 전집은 원고지 4만5천장에 교정지만 6미터에 달했는데 이를 최소 7번 이상의 교정 작업을 거친 끝에 출판했다고 한다. 장인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대역사(大役事)였던 셈이다. 그럼 홍 사장과 직원들의 이런 노력은 얼만큼 보상을 받았을까? “전집을 출판한지 1년쯤 지났는데 1천6백질 정도 팔렸습니다.” 당초 홍 사장은 손익분기점인 2천질을 못팔면 출판사 문을 닫겠다고 호언했다는데 어쨌든 ‘열린책들’이 문을 닫는 불행한 사태는 피할 수 있을 듯싶다.
외국문학을 전문으로 다루게 된 동기를 물어보았더니 조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회․역사적인 이유 때문이겠지만 우리 문학은 너무 리얼리즘에 치우쳐 있습니다. 소설의 본령은 허구이고 소설의 재미도 여기에서 나오는 것인데, 솔직히 우리 소설은 이런 점에서 조금 부족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재밌는 소설을 찾다보니 외국문학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거죠.” 그래서 그는 출판할 책을 고를 때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즉 재밌는 책을 우대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다.
홍 사장이 외국문학을 출판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뭐니뭐니해도 번역자의 문제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도 애초 1인 번역으로 기획됐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맡을 만한 역량있는 번역자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계획을 바꿔 소장 노문학자들에게 번역을 나눠서 맡기게 된 거죠. 실제 번역작업에 들어가서도 기존의 번역을 베끼거나 대학원생들에게 번역을 시킨 분들은 과감히 교체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는 또 우리 번역문학계의 편식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공간적으로는 미국, 시간적으로는 고전들에 너무 편중돼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16년간 출판일을 하면서 느낀 감회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무엇보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재밌습니다. 보람도 있구요. 거기다가 부와 명예도 부수적으로 따라옵니다. 이보다 좋은 직업이 없는 거죠. 저는 앞으로도 계속 외국문학을 소개하는 일을 해나갈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