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빠른 호흡, 안정감 있는 문체 : 양억관 역 『게르마늄의 밤』내가 뽑은 번역서 - 일어권
글 / 윤상인_한양대 일문과 교수. 1955년생. 저서 『세기말과 나쓰메 소세키』『미녀의 도상학』『일본을 강하게 만든 문화코드 16』 등
세상에, ‘최고의 번역’을 고르라니! 번역에 정답이 있을 수 없거늘, 하물며 ‘최고’의 번역을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고른단 말인가? 헤아려 보건대, 번역은 많아도 번역비평은 찾아보기 힘든 척박한 현실이 이 기획을 낳게 했으리라. 따지고 보면 그간 번역에 대한 비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역 사례를 집어내어 점잖게 훈계하거나, 비분강개하며 도덕주의를 제창하는 번역비평은 이미 익숙하다. 그러나 번역비평의 정도(正道)는 오답 찾기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번역 사례를 제시한 뒤, 왜 훌륭한지에 대해 성실하고 소상히 밝히는 것이야말로 생산적 비평행위에 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비평의 지향점은 무엇보다도 백낙일고(伯樂一顧)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최근 읽은 번역 소설 중 인상깊었던 것은 하나무라 만게쓰(花村萬月)의 『게르마늄의 밤』(씨엔씨미디어, 1999)이었다. 처음 대하는 하나무라의 소설이었지만, 단숨에 읽었다. 수도원이라고 하는 생경한 세계에다가 하드 코어에 하드 고어까지 곁들인 눈 따가운 내용으로 가득 찬 것이었음에도 막힘 없이 읽혔다. 번역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책 읽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안정감 있는 문체가 빛난다. 호흡이 빠른 문체의 리듬은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원작이 지닌 도발적 감각을 효과적으로 옮겨내고 있다. 시종일관 거침이 없으면서도 원작을 앞지르지 않고자 하는 절제의 미덕도 잊지 않는다. 이런 장점은 이 번역자에 의한 무라카미 류의 소설 번역에서도 발휘되고 있다. 이 번역자는 ‘얼굴’을 지니고 있다.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도 신중함을 빼놓지 않는 해결사의 얼굴이다. 번역 과정에서 봉착하는 난제와 고민을 독자에게까지 떠넘기지 않는 것이 해결사의 미학이다. 번역자에게 천재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독자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만큼의 숙련된 기능과 사려분별이 있으면 좋은 번역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한데, 순서로 따지자면 명마(名馬) 찾기에 나서기 전에 백낙(伯樂) 찾기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