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의 한국학자가 6년여에 걸친 연구와 집필 끝에 한국의 신화와 설화를 집대성한 방대한 연구서적을 출판하는 결실을 맺었다. 영국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 한국학연구소 주임교수로 있는 제임스 헌틀리 그레이슨(James Huntly Grayson)이 1995년 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최근 영국의 명문출판사인 커즌(Curzon)에서 펴낸 『Myths and Legends from Korea - An Annotated Compendium of Ancient and Modern Materials 한국의 신화와 설화 - 고대 및 근대자료에 대한 해설』이 그것이다. 이 책은 연구방법에 있어 동북아시아 설화와의 비교 연구 및 ‘드라마적 구조분석’ 방법의 차용이라는 독창성 때문에 국내 학계에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한 한국 고․근대 신화와 전설을 집성하고 싶도 깊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저술로는 서구어권을 통털어 가장 충실하고 방대한 규모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신화와 설화』에서 총 175편의 한국 신화 및 설화와 16편의 동북아시아 설화를 수록하고 이를 비교, 분석하고 있다. 책은 서술체계와 연구방법, 용어의 정의 등을 설명한 서장(序章)과 고대국가와 씨족의 건국신화(2장), 10세기 이전의 고대설화와 전설(3장), 10～19세기의 근대 민간설화(4장) 등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 장에는 해당 시기의 설화와 그에 따른 상세해설을 담았으며, 근원과 출처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였다. 특히 중국․일본․몽고․시베리아 등 인접 지역 설화와의 비교 연구 및 해당 설화의 소재와 내용을 ‘드라마적 구조분석’ 방법을 이용해 사물의 근원, 영웅담, 도덕, 모험․오락 등으로 유형 분류한 점 등은 이 책이 지닌 특장이라 할만하다.
이런 방식의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단군신화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건국신화와 그 구조가 비슷하다고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로 내려오고 싶어했던 점이나 환웅이 환인의 서자라는 점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지 않는 곰과 호랑이는 시베리아 여러 종족들의 신화에서 그 유사성이 발견된다. 단군신화가 부족 단위의 원시신화인지 건국에 관련된 상고신화인지에 대한 학계의 논란에 어느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셈이다.
『한국의 신화와 설화』는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우선 4백50여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으로 보는 이들을 긴장시킨다. 그러나 책을 조금만 살펴보면 이 방대한 분량이 단순환 과시욕의 결과가 아니라 4년여에 걸쳐 2백여종의 문헌들을 참고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산물이라는 점을 쉽게 수긍하게 된다. 책 말미에 수록돼 있는 50페이지 분량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표도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그레이슨 교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인류학 석사학위,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유럽의 대표적인 한국학자다. 그가 처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살 때 부모로부터 지구본을 선물받으며 “지금 전쟁 중인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다가 한국에 대해 막연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대학 시절인 60년대 중반 봉사활동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71년 교육선교사로 입국해 경북대와 계명대, 감리교신학대에서 종교학과 신학, 인류학 등을 가르치며 1987년까지 한국에 거주했다.
책의 출판 직후 한국을 방문한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 언론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평소 자신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놔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교적 성향이 가장 강한 나라인데 그러한 유교적 사고방식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 상실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는 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역사서술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에 경도돼 있어 비판적 연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적․보편적 시각으로 서술된 역사서가 아쉽다”는 지적 등은 충정어린 충고로 기억해 둘만하다.
한국 남자아이 두 명을 입양해 키울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그는 “한국은 유교적인 순수혈통주의 때문에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