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강웅식_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1960년생. 평론집 『시, 위대한 거절: 현대시의 부정성』, 『텍스트에서 경험으로』 등.
1992년은 내게 무엇이었는가? 금년에 중학생이 되는 나의 첫 아이가 태어난 해이다, 내게 1992년은. 당신에게는 무엇이었는가? 아마도 당신 역시 자신에게 나름으로 의미있었던 사건을 통해 1992년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1992년은 무엇이었는가? 1910년이나 1945년 혹은 1950년이나 1960년처럼 우리 개개인의 생애 이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큰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92년에는. 그러나 14대 국회의원 총선거(3.24)와 14대 대통령 선거(12.18)가 있었다. 1992년은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이 탄생함으로써 소련(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이 해체된 해이기도 하다.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들어 있는 깃발이 내려짐으로써 지구상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채로 종말을 고했던 것이다.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사회주의 실험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들에게 1992년의 그 사건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충격이었다. 1992년을 전후해서 우리 문단에 이른바 ‘후일담’ 문학이 등장했던 것도 그러한 시대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잘 알다시피 ‘후일담’ 문학은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겪는 정신의 혼란과 마음의 상처를 다룬 작품들을 가리킨다. 아름다운 보편적 이념의 실현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희생했던 이상주의적 열정과 헌신이 한낱 착각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자괴감에서 오는 고통, 그토록 경멸하고 증오했던 사회 체제의 모순을 먹고살기 위해 수락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 등이 ‘후일담’ 문학을 대표하는 정서적 내용이었다.
1992년은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환상과 무성한 소문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하루에도 수많은 출판사 생겨났고 동시에 사라졌다. 출판사들이 기업화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문인들이 오가다 들러 바둑을 두기도 하고 문학과 세상에 대한 환담을 나누던 ‘사랑방’의 공간은 출판사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 문단에서 여성 시인과 작가들이 이제까지 남성 시인과 작가들이 다루지 못했던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약진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인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었던 1992년에 교보문고가 발표한 베스트 셀러(종합)의 목록을 보면, 여섯 권의 소설이 10위권 안에 올라 있다.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벽오금학도』(이외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매월당 김시습』(이문구) 등이 그것들이다. 그 가운데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내게는 특별히 눈에 띈다(1978년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라는 작품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등단한 양귀자는 1992년에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우리 문단의 대표적 문학상들인 ‘이상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 작품은 발표된 후 ‘여성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러한 사회적 파장 덕분에 영화와 소설로 각색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보아도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작품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허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에는 작품 자체의 논리를 만족시켜야 하는 나름의 정합성(consistency)이 있다. 작품 바깥의 규준이 아니라 그와 같은 작품 내부의 규준에 따라 우리는 그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한다. 양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나는 엄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을 유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였다. 내게 보기에 양귀자가 유보한 것은 ‘엄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이 아니라 작품의 ‘엄정한 정합성’이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양귀자는 작품의 ‘엄정한 정합성’을 유보함으로써 초래될 것이 뻔한 작품 완성도의 훼손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언가 의도하는 것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이 작품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떤 환부를 자극했다. 그 자극이 여성 독자들에게는 통쾌함을, 남성 독자들에게는 불편함(혹은 불쾌함)을 안겨주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자극한 우리 시대와 사회의 환부는 무엇이었을까?
강민주라는 스물일곱살의 여성이 있다. 그녀는 남성을 극도로 혐오한다. 전화로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전화상담을 하는 상담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그녀가 남편의 욕설로 상처받는 한 여성과 상담한 후에 기록한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욕설과 일상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남자들은 미개인이다. 그들은 여태도 동물에서의 진화과정을 끝내지 못한, 아직 많은 부분 수성(獸性)이 남아 있는 야만인이다.” 그녀의 지독한 남성 혐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도박과 술, 계집질과 남 등쳐먹는 사기, 밤낮으로 휘두르는 주먹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요약되는 인물이다. 그런 아버지로 인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그녀와 어머니는 그녀의 나이 열한 살이 되어서야 ‘그 남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강민주는 ‘그 남자’를 단 한번도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 ‘그 남자’에게 새로운 먹이가 나타난 덕분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암달러상이 되어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여 그녀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물려준 것은 재산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돕던, 강민주와 동갑인 ‘남기’라는 이름의 사내를 경호원으로 남겨주었다. 강민주의 어머니에게 여러가지 은혜를 입었으며 강민주를 마음으로 사모하는 남기는 그녀의 말이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그녀의 충직한 하수인이다. 강민주는 결코 미모의 여성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다부진 결단력과 탁월한 냉철함과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임을 자부한다. 엄청난 재산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절대 충성의 사내를 소유한 강민주는 상담소의 전화상담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깨닫는다: “그랬다. 나는 그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비로소 내가 초월자라는 것을, 응징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깨달음에 근거하여 그녀는 세상 전체를 적으로 삼아 싸우기로 하고 ‘응징의 대리인’으로서 한 가지 일을 꾸민다. 그것은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이자 연기파 배우인 백승기의 납치이다. 화려한 연예계의 미남 스타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가정적인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수한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백승기를 납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남성을 혐오하는 강민주는, 그런 남성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 백승기 역시 숨겨진 비리들이 있을 것이고, 납치 사건으로 그가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그런 비리들이 밝혀질 것이며, 그로 인해 모든 남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자신의 남성에게 고통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착각하는 여성들의 환상을 깨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백승기를 납치해서 그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강민주는 그에게 연민과 동정과 애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를 연모하는 남기가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작품의 ‘엄정한 정합성’의 측면에서는 허점이 자주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러나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제도 속에서 이런저런 불평등을 감수하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미혼의 여성들에게, 또한 가족 제도 내부에서도 남성들로부터 유형무형의 폭력에 고통을 받는 기혼의 여성들에게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 강민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남성들에 대한 그녀의 적대감은 나름의 대리만족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작품의 두 대목에서 강민주는 남기와 백승기를 흠씬 두들겨 팬다). 결국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자극한 우리 시대와 사회의 환부는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제도적 불평등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 구조에 편승하여 남성들이 휘두르는 파렴치한 폭력이었다. 일상생활에 작용하는 소단위 권력들을 비판하고 부르주아 문화에서 탈출하기 위한 모색 가운데 하나로 ‘여성주의’는 나름의 분명한 존재 이유를 갖는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게는 그런 ‘여성주의’의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남성이면서 문학평론가인 나는 우리 문학의 여성주의가 진정으로 폭발력을 획득하려면 고려해야만 하는, 남성들까지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진리에 대해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만 두기로 한다. 결혼하고 15년 동안 한 번도 아내를 때려 본 적은 없지만, 남성중심주의 제도에 편승해서 아내에게 가했을 그 어떤 폭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가슴 철렁한 반성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그런 폭력을 자행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나는 ‘그 어떤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