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아직 세상을 모를 때, 더군다나 혼자서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던 나이에 이미 ‘소설가’ 수업을 시작했다. 누가 그렇게 하는 게 네 인생의 길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글로 썼다. 누가 써 놓은 책을 읽는 게 재미있고 책을 읽으면 그것을 현실로 착각했다. 어머니의 눈에는 그런 딸이 무언가 정신에 병이 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시기는 육이오 전쟁의 상흔이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던 때였다. 강원도 양양은 전쟁 중에 되찾은 땅이어서 한동안 ‘수복지구’로 관리되었을 것이다.

생존 자체가 아주 원천적으로 남루해진 그 곳에서 먹고사는 일이 질곡이던 때, 처음엔 작문이라고 하는 짧은 글을 썼다. 사람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긴 이야기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저절로 써졌다. 국어 선생님이 책으로 내준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몰랐다. 물론 거품으로 지워진 사건이었다. 그즈음 처음으로 쓴 단편소설이 어떤 대학의 학생작품 공모에 입선했다. 그래도 늘 무언가 엉뚱한 상상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딸에게 부모님은 ‘교사’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되는 게 좋은 팔자라고 했다.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굶어죽기 십상’에다 ‘기생팔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글쟁이’길로 가기 위해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로 들어갔다.

청춘기는 내내 무언가를 고민하며 살았다. 고민은 대게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것들에서 생기는 부산물이었다. 그 고민들이 글로 써졌고 그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글이 대충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흉내내기에 바빴다는 걸 알아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읽은 책은 동화에서 시, 소설 등이 다 서양의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수복지구 출신의 ‘강력한 구호물자’ 수혜자였다. 청춘의 허리쯤을 지날 때, 등단을 해서 직업작가가 되었다. 소설가도 노동자며 그 노동은 다른 노동과 교환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위 사회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무엇에 관심가지면 그것에 깊이 빠져드는 지병이 있어서 ‘사회현실’이라는 것에 사로잡히고 계급갈등이니 역사의식이니 민족문제니 하는 것에 내 의식이 개간(開墾)되었다. 그리고 여자로서 결혼을 했다. ‘결혼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무언가 여자로서 소설가 노릇하는 것과 결혼해서 사는 일은 서로 알게 모르게 배척되는 것 같은, 불길한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나라가 인정해준 ‘짝짓기’로 가정을 가지고 그 속에 한 남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해 두고 사는 게 참 좋았다.

내 생명의 유전자가 지닌 불행이 소멸되었다고 느끼며 ‘즐겁고 행복한 나의 집’에 대한 환상이 극에 이르렀을 때, 비극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면서 나는 아주 굉장한 불평등 관계가 ‘국가에서 인정하는 남녀관계’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던 것이다. 언제나 남의 불행은 강 건너 불이어서 그런 불평등이 내 현실이 아닐 때는 몰랐었다.

다시 이 새로운 ‘복병’에 사로잡혀 그것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내 조상을 들여다보고 남편의 조상을 들여다보고 소위 인류역사를 들여다보고 ‘제도의 모든 것’을 살폈다. 불행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즐거운 나의 집’을 영원히 즐거운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여자인 나는 누군가, 이것이 문제였다. 여자인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정복과 승리의 축배를 들게 했겠지만 내겐 고통과 소외의 시작이었다. 결혼해서 살면서 그 제도에 도사린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파 뒤집는다는 것은, 자기 생을 해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내가 가진 사회적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 방법은 대충 자기 비하와 굴종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내 중년의 나이에 펴낸 『절반의 실패』, 『사랑과 상처』, 『이경자 모계사회를 찾다』 같은 책은 이 와중에서 저절로 ‘낳은 똥’과 같다. 그 똥을 ‘낳지’ 못했다면 나는 병원에서조차 병명을 찾아내지 못할 병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내 삶의 자기 비하와 굴종의 뿌리가 뽑혀야 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찾았다. 『그 매듭은 누가 풀까』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건 놀랍다. 그 소설을 마지막으로 손보고 있을 때, 남편이 마침내 ‘이혼’을 요구했다. 결혼생활 28년 만이었다.

소설가가 사는 생이란 참 이상하다. 자기 생을 두고 타인의 생에 몰두한다. 그래서 그 생을 문자로 복원해 내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타인의 생은 복원을 통해 사라지고, 다시 다른 생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 빈 공간에서 지금, 퍽 낯선 여행자인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