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_소설가, 한서대문예창작과교수. 1942년생. 소설『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장마』『에미』『완장』『낫』등
윤흥길은 여섯 살이 되던 47년, 이리로 이주한다. 하지만 이리에서의 어린 시절은 잦은 이사, 무허가 판잣집, 아버지의 실직 등 극심한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향인 정읍에서는 지방 명문인 강경상업을 졸업한 아버지 덕분에 행복한 유년을 경험했었기에 그가 이리에서 체감한 불행은 수은주가 가리키는 온도를 훨씬 밑돌았다. ｢집｣이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그려지고 있듯, 안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집의 상실은 어린 윤흥길이 방황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 가난의 원인제공자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현실 일탈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가출을 택한 그는 무허가 판잣집이 철거를 당한 무렵을 전후해 다섯 번의 가출을 감행한다. 평론가 황종연의 표현을 빌면 그의 가출은 “친근한 삶의 경계를 넘어서 보다 넓고 낯선 세계와 접촉하는 기회”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가 처음이었다니 꽤나 어린 나이에 가출을 경험한 셈이다. 그렇지만 그의 가출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한국명작소설총서의 열 번째 작가로 선정된 윤흥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출 욕구가 꿈틀거릴 적마다 부지런히 소설에 매달렸고, 작품을 통해 낯선 땅에서 낯선 인물들을 만나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들을 대신 이룰 수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가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추구해온 문학과 걸어온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현실과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한 모색인 가출을 ‘유토피아 찾기’라고 명명해도 무방할 듯하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이리는 윤흥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정읍에서의 체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나 주로 이리에서의 기억이 그의 문학을 형성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익산군과 이리시가 합쳐져 지금은 익산시로 행정구역이 바뀐 이리시는 호남선과 전라선, 그리고 군산선이 만나는 교통의 결절지이다. 윤흥길이 처했던 지리적인 여건은 기차만 타면 가지 못하고, 닿지 못할 곳이 없었다. 긴 여운을 끌며 울리는 기적소리와 출력을 높이는 기관차의 엔진음은 반항심 강하고 예민한 소년 윤흥길의 가출 욕구를 부추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윤흥길이 58년 이리 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이리는 이제 파편이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어렵게 장만했으나 강제 철거당한 무허가 판잣집이나 한해에 일곱 번이나 옮겨다녔다는 셋방들의 자취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금년 초에 출간된 연작소설집 『소라단 가는 길』에서 윤흥길은 6․25를 전후한 어린 시절 기억을 고스란히, 그리고 정교하게 복원해내고 있다. 그가 작품 내에서 그려내는 구체적인 지형도를 따라가노라면 우연히 찾아낸 앨범 속 사진을 한장 한장 감상하는 듯 정겹다. 필시 빛이 바랜 데다 네 귀가 허물어지고 잔주름투성이인 그 흑백사진들은 우리가 거쳐온 과거의 어느 한 때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에서는 이리역 폭파사고가 등장한다. 77년 11월, 사망 59명, 중경상 1,300여 명의 인명 피해와 가옥의 70퍼센트 이상에 해당하는 7,800여 채가 파손된 이리역 폭파사고로 ‘인철이네 집’이란 은어로 불리던 철인동 사창가는 아파트와 상가 밀집지역으로 변모했다. 철인동은 57년, 이리시가 25개 동을 12개 동으로 축소 개편할 때 공식적으로는 그 명칭이 없어졌음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오명을 안고 있던 철인동은 폭파사고의 악몽과 더불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엄청난 재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사망자 수에 대해선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역 주변에 형성되어 있던 철인동 사창가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텐데, 그곳에서 생활하던 여인들의 숫자가 공식 집계된 바 없고, 신원 파악이 어려웠기에 상당수가 사망자 명단에서 누락되었을 거란 추측이다.
자전적 기록이나 72년 발표작인 ｢집｣이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등에 나타나는 시 당국이 철거민들의 임시 거처로 마련한 전신전화국 자재창고는 두 채중 한 채만이 남아 현재는 기술직업전문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집｣에서도 언급되고 있거니와 ｢종탑 아래에서｣의 주요 모티프가 되는 교회 종탑은 전신전화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광교회 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 지은 현대식 교회 건물 아래에 자리한 종탑은 ‘엄청 크게 보이던 것이 나중에 보니 그렇게 작을 수가 없더라’는 윤흥길의 술회가 아니더라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 생경하기까지 하다. ｢소라단 가는 길｣에서 어느 작중인물이 ‘개발 바람에 옛 모냥이 어느정도 망가지는 것이사 어쩔 도리 없다 허드라도 요로콤 하나에서 열까장 철저하니 망가질 수가 있을까?’하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왕성한 식욕으로 낡고 오래된 것을 먹어치우던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종탑만은 비켜간 것이다.
78년 발표작 ｢땔감｣이나 ｢큰남바우 철둑｣의 배경이 되는 익산역 구내는 50년 7월 초, 인민군이 점령한 수원역으로 오인한 미군 B-29 편대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오는 4월부터 운행되는 고속철도에 대비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멧돼지｣에서 역전 광장은 각종 행사와 궐기대회가 개최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농림핵교 방죽｣에서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방죽은 매립되어 익산대학의 건물 부지와 실습답으로 바뀌었다. 지나가는 학생 몇 명에게 방죽의 위치를 물었지만 돌아온 건 도리질과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마침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에게 다가갔더니 내 말을 들었던지 갖고 있던 지팡이로 정문 바로 왼쪽을 가리킨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다 문득 흑인 갓난아기의 시체가 떠다니던 위치를 가늠해 보느라 미간을 좁힌 내 시야에 한쪽 줄이 풀린 플래카드와 아이들 셋이 들어왔다. 세찬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플래카드를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들과 궂은 날이면 방죽 둑길 위로 출현하는 미친 여자의 치맛자락을 걷어올리던 아이들의 영상이 겹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전나무의 사열을 받으면서 찾아간 그의 모교 이리초등학교는 오래 전에 지은 붉은색 벽돌 건물과 신축한 흰색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원래 교문이 있던 곳에서 표지판을 따라가자 새로 만든 교문이 나타난다. 교사 사이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아름드리 전나무가 학교의 역사를 짐작케 해준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이 근처의 전나무 숲은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
에서 “성미가 아무리 급한 사람일지라도 그곳에선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다”고 묘사된다. 서정주는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농림핵교 방죽｣에서 한 작중인물은 자신들을 키운 팔 할은 농림학교 방죽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윤흥길이 작가로 성장할 감수성을 제공한 건 이 전나무 숲이 아니었는지……
표제작인 ｢소라단 가는 길｣의 소라단은 남성학원에서 학교부지로 매입하여 남성중고, 남성여중고가 이사를 왔으며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숲 일부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시민들의 산책로 구실을 하고 있는 건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역무원에게 돈을 내밀고 표를 받아든다. 대합실은 안내방송과 오가는 여행객들로 소란하고 분주하다. 내가 탄 기차는 가출 소년 윤흥길을 태우고 달렸을 지도 모르는 레일을 밟고 천천히 움직인다.
집으로 돌아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출발지이자 도착지가 되는 집은 언제나 넉넉한 품을 열어두고 있을 것이다.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한 가출을 부추기는 교수이기도 한 윤흥길 역시 종착지는 집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으로 돌아가 안주할 날은 요원해 보인다. 유토피아 찾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사전식 풀이로는 ‘이상향’인 유토피아의 원래 의미는 ‘없는 땅’이다. 이는 곧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므로.
2000년 서울 국제문학포럼의 토론자로 참석한 윤흥길은 자신의 유토피아 찾기가 계속될 것임을 아래와 같이 시사하고 있다.
시대의 단순한 삶을 작품에 투영하는 단순한 증언자, 기록자로서가 아니라 특별하고 내밀한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가다운 작가를 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