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병규_동화작가. 1948년생. 동화집 『희망을 파는 자동판매기』『백번째 손님』 등.
나뭇잎은 떨어져도 마냥 아름다웠다.
땅 위에서 뒹구는 단풍은 매우 사람을 닮았다.
간밤에 내린 비가 떨어진 이파리들을 매매 씻어 놓았다. 그래서 말끔하지만 해쓱했으며 좀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 낙엽들을 밟을 수 없었다. 나는 마치 사금파리 같은 빈 곳을 찾아 이리저리 건너뛰듯 걸었다.
그러다 보니, 경내를 거의 한 바퀴 다 돌았지만 내가 옳게 본 것은 단청도, 절집 처마에 달린 풍경도, 대웅전의 부처님도, 더더욱 뒷산 절경은 아니었다.
오직 가장 낮은 자세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낙엽을 만났을 뿐이다.
아직 비는 그치지는 않았다. 는개가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기도 하고 접은 채 그냥 손에 들기도 했지만, 나는 맨손이었다.
어느 해 늦가을, 광주에서 무슨 문학 행사를 마치고 나서 전남 장성의 백양산 아래까지 와서 하룻밤 묵은 뒤, 이른 아침에 백양사를 찾았을 적의 일이었다. 시인, 연극 배우, 시 낭송가 등 예닐곱이 일행인데, 모두 ‘여류’고 나만 ‘남류’였다.
앞서서 설렁설렁 걸어가며 안내하던 분이 멈춰선 곳은 대나무바자 울타리 끝에 달린 사립문 앞이었다. 반쯤 열린 사립문 안에는 작은 연못과 황톳집이 운치를 안개처럼 피우고 있었다.
“주지 스님께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가요.”
우리는 얼떨결에 선방에 들어가서 한 스님께 재배를 올리고 마주 앉게 되었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똑바로 뜨고 응시하는 눈빛에서는 예지가 느껴지는 스님이었다.
내어온 녹차의 향은 머리를 맑게 했고, 찻잔의 온기는 가슴을 안온하게 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스님은 우리에게 차례로 돌아가며 건강이나 집안 내력들을 한 마디씩 건넸는데, 듣는 사람마다 놀라는 기색이었다. 어느 시인은 ‘지식의 때’가 너무 많다는 따끔한 충고를 듣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넌 뭔데 여기 끼었느냐’는 듯한 눈길을 나한테로 던지셨다.
“처사는 무엇 하는 사람이오?”
“저, 동화를 씁니다.”
“뭐?”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를 씁니다.”
“음, 그래서 얼굴이 밝구나! 동화를 쓴다니까,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하지.”
그래서 듣게 된 것이 한 동자승이 독을 뒤집은 이야기였다.
옛날, 어느 작은 절에 말썽꾸러기 아기 중이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바깥 볼일이 있어서 산문을 나서며, 아기 중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마침 장 담그는 철이라, 담 아래 줄멍줄멍 놓인 장독들을 모두 씻어서 ‘뒤집어’ 두라고 했다.
그날 해거름에 절에 돌아온 스님이 보니, 본디 장독들은 온데간데 없고 쭈그렁이 독들만 있었다. 스님은 아기 중을 불러 냅다 호통을 쳤다. 독이 왜 죄다 저 모양이냐고, 우리 독은 어쩌고 저 따위들을 어디서 가져다 놓았느냐고……. 그러자 아기 중이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댔다.
“스님 말씀대로 ‘뒤집어’ 놓았는데요.”
놀라 눈을 치뜬 스님은 아기 중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스님이 독들을 ‘위가 아래로 거꾸로 되게’ 뒤집어라 했는데, 아기 중은 ‘안이 겉으로 드러나고 겉은 속으로 들어가게’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주지 스님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이랬다.
“이런 기적(옹기를 양말처럼 뒤집은 것을 분명 기적이다)은 믿음에서 비롯된 거야. 아기 중은 스님께서 시키신 일은 그대로 하면 된다고 믿었어. 그래서 독을 뒤집을 수 있었지. 처사는 동화가 어떤 구실을 하리라 믿소?”
“…….”
나는 대답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묵묵히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봐요. 저 허공에 무슨 금이 있나? 그런데 사람들은 네 것 내 것 편가르는 온갖 금을 긋고 있지.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다 그 탓이야. 그 금을 지울 수 있는 기적의 지우개는 오직 하나 뿐이지. 바로 동심이라는 거……. 부처님 마음도, 예수님 마음도 다 동심이거든. 오늘 날 동화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그 순간 나는 정수리에서 발끝으로 전류가 짜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내가 동화 작가로 행세해 온 게 4반세기가 넘지만 이런 명쾌하고 깊은 동화의 정의를 어느 책에서도 읽지 못했고, 어느 학자한테도 들은 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