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원규_시인. 1962년생. 시집 『빨치산 편지』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등.
실로 먼길을 돌아서 왔다. 예까지 오는데 반생이 걸렸으니 이제 다시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문단에 얼굴을 내민 지 20년이 되었다. 문학적 결실은 미미했으나 예까지 오는 길은 진흙탕과 가시밭길이었다. 세상의 부름에 어깨를 걸고 장구를 치고 춤을 추느라 10년을 보내고, 그 사이 죽거나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며 목을 꺾고 무릎을 꺾고 자책의 묵념을 하느라 10년을 보냈다.
지리산에 박혀 있다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거나 어쩌다 문단 풍속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여여하다. 변한 게 없다. 이것 참, 대단한 일이 아닌가. 문단 권력 언저리에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며, 조금의 권력이라도 가진 듯 우쭐우쭐 촐싹거리는 모습이며 모두가 여여하고 여여하다.
이것 참, 신기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지도 않은 문단 권력에 기대는 사람은 많아도 문학의 힘, 문학의 권위에 목숨을 거는 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만 변해야 할 것들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 슬픔인가. 변방에서 침침해진 눈으로 바라보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무량하다.
작설하고, 멀어지고 잊혀질수록 나는 비로소 내 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태풍이 불어도 휘둘리지 않고, 폭풍 전야의 고요하고 고요함 속에 휩싸여도 두렵지 않고, 아무도 날 찾는 이 없어도 외롭지 않다. 세상 모든 소식이 다 남의 일이자 곧 나의 일임을 간신히 알겠으니, 남의 일이라고 소 닭 보듯 하지도 않고, 또 세상 모든 일이 마치 나의 일인 양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마치 수령 오백년의 당산나무처럼. 스스로 그러하듯이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마다 잎을 피우며 속으로 천천히 나이테를 만드는 동안 그늘이 더욱 깊어진 수령 오백 년의 느티나무처럼.
아니, 느티나무처럼이 아니라 어쩌면 그 느티나무의 둥치 속으로 자꾸 내 몸을 밀어넣는 무임승차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늙지 않고 속으로 알차게 늙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랴마는, 생의 시계는 양적인 시간으로만 가는 게 아님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보는 것이다. 알차게 속으로 늙는다는 것은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는 상식에 기꺼이 발을 맞추는 것이며, 한 걸음 한 걸음 무덤으로 가는 길 위에서 조금씩 더 여유롭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가더라도 머리가 먼저 가면 교만이라는 지식의 올가미에 걸리기 쉽고, 또 가슴이 먼저 가면 격한 싸움 뒤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가더라도 먼저 발이 가고 온몸이 가고 머리와 가슴이 뒤따라가야 한다. 행선(行禪)의 원리가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눈을 들어 먼 곳을 탐색하기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 발바닥에 집중하는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렇게 걸어보면 발바닥 아래 풀씨가 꼬물꼬물 움트고 마침내 발자국마다 꽃이 피리라.
매일 가는 길도 이렇게 처음 가는 길이라면 날마다 꽃길이다. 가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사람의 걸음걸이가 마치 날아온 것처럼 엄청난 속도의 비보(飛步)였다는 것을 실감하리라. 탐진치에 걸려 나자빠지지 않는 무애의 길 위에서 돌아보면 발바닥이 곧 날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렇지 않은가. 사람에게 날개가 없는 것은 직립의 발바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반도의 마을마을 당산나무의 푸른 눈빛과 걸음걸이로 세상을 나선다. 지리산을 떠나 이 마을 저 마을 탁발의 길을 나선다. 고맙고도 고맙게 밥과 술을 주면 얻어먹고, 재워주면 자고 재워주지 않으면 노숙하고, 무슨 걱정이랴. 욕을 하면 욕을 먹고, 농삿일을 시키면 일을 하고, 상여를 메라면 상여를 메고, 때리면 맞고, 배고프면 굶으며 3년이 될지 5년이 될지 알 수 없는 길을 떠난다.
발자국 발자국마다 풀씨가 돋듯 시의 씨앗이 꼬물꼬물 움트면 더더욱 좋고. 벌써부터 겨드랑이가 아니라 발바닥이 간질간질 가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바닥이 곧 날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