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을 어떤 지역과 연상하여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전라도 강진이나 경기도 양평 양수리를 떠올릴 것이다. 다산이 20년 가까이 귀양살이한 강진이 인상 깊게 남아 있고, 양수리가 고향으로서 묘소를 비롯한 이러저러한 유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로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충청도 청양이 고향인 나로서는 특별하게 다산이 청양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믿는다. 내가 그렇게 믿는 이유가 있다.

  다산은 34세 때인 1795년(정조 임금 19년)에 7월 26일(음력)부터 그 해 12월 23일까지 청양의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어 머물렀다. 이가환과 함께 다른 당파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었던 다산은 바로 전에 발생한 주문모 신부 사건에 연루되어 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는 승지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좌천되었다.

  다산에게 금정은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지금도 청양은 군세가 약한 지역의 하나로 꼽힐 만큼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곳이다. 금정역은 청양에서 예산으로 넘어가는 남양면의 구봉산 앞에 있었다. 일제 때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금광인 구봉광산이 명성을 자랑한 곳이지만 현재 이곳에 역이 존재했다는 자취는 없다. 금정(金井)이란 이름에서 금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다산은 이 외진 산골짜기에서 꼭 5개월을 머물렀다. 3품의 고위직에서 요즘의 역장에 해당하는 7품의 찰방이란 미관말직으로 전락한 다산에게 청양은 그야말로 좌절의 고통을 곱씹는 지역이었다. 이 좌절의 시기를 다산은 어떻게 보냈을까? 이 무렵의 그의 내면을 금정찰방의 집무소인 오죽헌(梧竹軒)에 붙인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을묘년 가을에 나는 승지로부터 금정찰방으로 보임되었다. 편지를 보내 위로하는 조정의 관료들이 많았다. 하지만 찰방직에는 즐거움이 세 가지가 있다. 나갈 때 빠른 말을 타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역에 속한 지역의 곳곳에 있는 산수를 유람하고, 이르는 곳마다 식량이 마련된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평소에 공무가 적어 일체의 미염(米鹽), 옥송(獄訟), 공문서의 번잡함이 없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다산은 외진 역에서 가을과 겨울을 보내면서 그의 말대로 곳곳의 산수를 유람하는 즐거움을 맛보았고, 번잡한 공무가 없는 점을 이용하여 독서와 저술, 시문창작의 기회로 삼았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퇴계 이황의 편지글을 읽고 그 독후감을 『도산사숙록』이라는 이름으로 엮었다. 5개월의 짧은 시기를 학문적으로 유용하게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청양 곳곳을 다니며 “아낙은 깨를 타작하고 남정네는 바심하니 / 세상의 호걸은 농민인가 하네”(「청양을 지나며」)라든지, “가련하다 지나는 곳마다 / 곳곳에 깊은 산이 있네”(「계전 촌가에서 쉬며」)와 같은 류의 많은 시를 써서 특색있는 산천과 풍속을 묘사하였다.

  다산이 청양에서 발견한 자연은 우선 금정역의 남쪽에 버티고 서 있는 구봉산이었다. 다산은 역사 앞에 높다랗게 버티고 선 구봉산을 바라보며 매우 답답하게 느껴 이런 시를 지었다.

시름 젖은 얼굴 앞에 겹겹 산이 조여드니

답답하기 언제나 독 속에 앉은 꼴이라네.

번쾌(樊噲) 같은 힘센 장사를 어디서 얻어다가

저 놈의 구봉산을 걷어차 엎어볼까.

  다산이 왜 이렇게 느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만 들을 압도하는 구봉산의 모습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다산은 이 시를 짓고 나서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구봉산에게 사과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다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산수는 현재 광천과 보령 경계에 소재한 오서산(烏棲山)이다. 해발 791미터의 이 산은 이 지역의 명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고, 정상부근에는 갈대밭이 무성하여 지금도 서해의 등대산이라고 불린다. 부여와 공주를 유람하고 온 다산은 진사 신종수(申宗洙)란 사람과 함께 한창 단풍이 고운 오서산을 올랐다. 화창(花廠)을 거쳐 천정암(天井菴)에 올라 서해의 낙조를 구경하고 정상에 오른 뒤 이곳 절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 절에서 술을 마시며 신종수와 번갈아 연구(聯句) 시를 짓다가 다산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그 다음날 아침 다시 시를 짓고 산을 내려왔다. 오서산 등반에서 다산은 10수의 시를 지었다. 「천정암에 올라」, 「일몰을 구경하고」, 「오서산 절정에 올라」, 「산중에서」 등이 그 제목이다. 그 가운데 일몰을 묘사한 시를 한편 보자.

어슴푸레 구리 징이 수평선에 걸려서

한 덩어리 햇무리가 구름 끝에 명멸하네.

거꾸로 잠긴 노을빛은 황금물결 부수고

길게 뻗은 산 그림자는 넓은 들을 거둬 저무네.

그 누가 시켰던가? 오가며 밤과 낮을 갈라서

이 세계를 열었다 닫았다 하도록 말이다.

해지는 곳은 중국땅 연제(燕齊)에 있으니

허환(虛幻)의 세계가 동서로 나뉘는 이치 곰곰이 따져보리.

  서해바다의 수평선과 섬자락, 찬란한 일몰의 광경은 지금도 이 지역의 명물이다. 다산은 일몰의 광경을 묘사하고 일몰과 일출로 밤낮이 갈리는 자연의 장엄함과 또 중국땅에 이어지는 바다의 드넓음을 감탄하였다. 다산의 작은 일에 골몰하지 않으려는 드넓은 흉금과 시야를 엿볼 수 있다. 뒷날 오서산에서 본 일출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기도 할 만큼 인상깊은 체험이었다.

  다산이 2백년 전에 일몰을 바라보고 저와 같은 시를 남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시도 시이지만 이 등반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다산이 한 특이한 걸인을 만난 이야기이다. 다산이 오서산을 탐방한 자초지종을 기록한 글인 「유오서산기(游烏棲山記)」에는 그 걸인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절정 가까이 올라서 몇 칸 되는 절이 나타나는데 스님은 보이지 않고 걸인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이상하여 사연을 묻는 다산에게 걸인은 지난해에 범이 스님을 물어가 모두들 절을 떠났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이 새끼 세 마리를 거느린 범을 만났는데, 새끼를 칭찬하자 범이 좋아하며 가버렸고, 자기는 겁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행한 신 진사는 범이 무서워 그만 내려가자고 하였고, 그 걸인이 자기하고 다니면 해가 없을 것이라고 하여 일몰을 구경하고 절에서 잤다. 다음 날 그 걸인과 함께 하산할 때 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걸인이 껄껄 웃으며 “너는 이제 떠나라”라고 하였다. 신 진사는 범의 꼬리를 보았는데 다산은 보지 못하였다. 다산은 오서산에서 만난 이인(異人)을 회상하면서 깊은 산중에는 이인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저와 같은 이인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생각하여 썼다.

  금정찰방으로 재직하면서 다산이 여행한 곳은 그 외에도 충청 수영이 있는 보령의 영보정(현재의 오천)과 부여, 공주가 있다. 추석에는 절도사인 유심원(柳心源)의 초청을 받아 배를 타고 노닌 뒤 「유영보정기」를 남겼고,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를 유람하여 조룡대(釣龍臺), 고란사, 자온대(自溫臺), 공북루(拱北樓) 등을 오르고서 제각기 시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온양의 봉곡사(鳳谷寺)에서 호서 지역의 학자들과 성호(星湖) 이익(李瀷)의 저서를 편집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보낸 5개월 동안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다산은 금정찰방으로 있는 동안 60여 수가 넘는 많은 시를 지었고, 몇 편의 산문과 단행의 저서를 남겼다. 서울로 돌아온 다산은 이 때 지은 작품을 정리하여 『삼천첩(三遷帖)』으로 엮었다. 지금은 이 시집이 남아 있지 않지만 금정 시절이 다산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발산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가 있을 때 금정 시절을 추억하며 “내가 금정에 좌천되었을 당시는 몹시 슬퍼했었는데 이제 이곳저곳 떠돌아 귀양을 다니며 거처가 일정치 않은 상황에서 그 옛일을 생각해보니 그 때가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였다.

  다산이 청양에 와서 머무는 동안 시인묵객들의 관심을 얻지 못한 이곳의 자연에 신선한 의미를 불어넣었다. 칠갑산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이 유감이기는 하지만 다산과의 인연이 거기에까지는 닿지 않았으므로 탓할 것이 없다. 광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나는 소풍을 주로 오서산으로 갔었다. 다산의 범 이야기를 읽으면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기는 그때에도 오서산은 깊은 산중의 느낌이 있었으니 범의 출몰은 사실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