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누구나 한번쯤 그것을 쓴 작가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된다. 「분지」와 같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십수년 전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적잖게 놀랐다. 풍자문학의 정점으로 손꼽히는 「분지」의 작가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조용하고 차분했다. 거구는 아니더라도 완력이 여간은 할 것이라는 짐작과는 딴판이었다. 작고 깡마른 선생의 모습 어디에서도 「분지」의 그 거침없는 비판과 통렬한 풍자, 호쾌한 웃음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내가 먼 발치에서 보아온 선생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누가 청하면 그때서야 소년과 같은 수줍은 표정으로 몇 마디의 말을 보태는 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나는 선생의 모습에서 곧은 옛 선비의 풍모를 읽어낼 수 있었다.

  추위가 한풀 꺾인 지난 2월 10일, 선생을 뵙기 위해 쌍문동으로 갔다. 심한 감기 증세로 출입하고 있는 병원 앞에서 만난 선생은 고단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변함 없이 투명하고 차분했다. 병원과 약국은 그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지울 수 없을 만큼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폐에서 시작된 결핵은 장과 임파선으로 옮겨가며 그를 사지의 문턱까지 몰고 갔었다. 모두가 ‘죽는다’고 했던 소년이 누워서 볼 수 있는 것은 책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역사, 철학, 인문학서적이 그를 안내해 간 곳이 소설이었다.

  그에게 문학을, 소설을 가르쳐준 스승은 오로지 책과 현실이었다. 김유정의 「땡볕」은 그에게 소설에 대한 섬광이었다.

  1958년 단편 「경고구역」으로 문단에 나온 그는 1961년 제 6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 된 중편 「너는 뭐냐」로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1965년 발표한 「분지」는 그에게 영광과 시련을 함께 안겨주었다. 『현대문학』에 발표된 「분지」는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왜곡된 시대가 자신의 그 추한 본질을 여지없이 들춰낸 작가를 가만히 방치할 리 없었다. 그를 대접한 곳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 진을 치고 있던 중앙정보부의 을지로 안가 ‘충일기업사’였다.

  “200자 원고지로 120장 정도던가. 그런데도 왜 그렇게 그 소설이 길고 길게 느껴지던지. 수사관들의 주먹다짐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한줄 한줄 읽어내려가자니 천장 만장짜리 소설보다 훨씬 더 길게만 생각되었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선생은 「분지」를 쓸 당시 한국사회를 식민지의 연장상황으로 보았다.

  “국군의 통수권을 남의 나라에 내주고서 어떻게 독립국가라고 할 수가 있겠나?”

  당대의 장막을 걷어내고 진실에 육박해나가려는 사람이 작가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선생은 요즘의 후배작가들이 시대의 예각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국민의 80%가 문맹이던 시대에 맺어진 불평등한 협정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이런 나라의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런 자각이 없다면 곤란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정말 선생을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다. 그는 지난 96년 『창작과비평』에 단편 「세상 끝에서」를 발표한 이후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글을 쓰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데 조금만 집중을 하면 심한 현기증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런 증세는 74년 긴급조치 1호(유신헌법 비방)와 4호(민청학련 배후)로 체포되어 남산의 중앙정보부 6국에서 졸도할 때까지 치도곤을 당한 다음부터 생긴 것이다. 30년을 신경안정제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그는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도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한다.

  “「분지」를 쓸 때 이 현실은 가짜다, 거짓이다, 고 생각했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 선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진짜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울리면 한 번 제대로 뛰고 싶었는데, 제대로 한 번 쓰고 싶었는데, 제대로 뛰어보기도 전에 이 나이가 되어버렸다.”

  37년째 살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쌍문동 집으로 향하는 선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쏜살같이 뛰어가는 선생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가 뛰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 만큼 우리 독자들에게 남은 복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