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화’가 우리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9·11 테러 이후이다.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 이슬람은 또 한번 우리에게 경이롭고 무시무시한 공포로 각인되었다. 우리에게 이슬람은 머나먼 땅이었으며, 악마화된 타자였다. ‘그 날’ 이후, 지성계에서는 우리의 왜곡과 무지를 자각하는 움직임이 일었으며, 테러와 이슬람을 동일시하는 시각에 대한 비판의 글들도 쏟아졌다.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었으며, ‘서구화=미국화’인 우리에게 이슬람은 관심 밖의 세상이었다.
이런 우리의 한계 상황에서 제 3세계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저변 확대를 위해 한국 독자들에게 반드시 소개하고 싶은 작가가 바로 야샤르 케말이다. 야샤르 케말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아직 낯설지만, 서구 유럽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터키 작가이다. 1987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야샤르 케말은 터키 문단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터키 현대 문학에 굵은 한 획을 내리그었다.
야샤르 케말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아마도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소외된 주변부인들의 삶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소설을 메우는 주인공들은 소수민족, 여성, 가난한 소시민, 도시빈민 등이며 서구화를 통해 잃어버린 전통과 가치 회복을 위해 많은 민속학 자료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전통과 민족 문화에만 제한되어 있지는 않다. ‘전통’보다는 ‘보편적이며 인간적인 가치’에 그의 무게 중심이 놓인다. 전통이라는 과거의 가치관에 집착한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구습은 단호하게 청산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가장 터키적이며 가장 세계적인 작가를 꼽는다면, 단연 야샤르 케말일 것이다.
구습의 청산과 비판을 주제로 한 작품 가운데 『피의 복수 Yillani Oldurseler』는 터키 동부지방에 계승되고 있는 명예죄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갖은 고생과 고학이라는 험난한 인생여정을 통해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야샤르 케말의 아버지 역시 피의 복수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났다. 명예죄와 피의 복수는 대부분의 문명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소멸되었지만 유목민으로서 오랜 세월 혈연공동체적 삶을 살아온 많은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서는 아직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풍습이다. 야샤르 케말은 위의 소설에서 청산되어야 할 구습, 피의 복수의 가혹한 종말이 무엇인지를 처벌의 희생양이 되었던 한 여성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이 작품은 야샤르 케말이 1950년대에 코잔(Kozan)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에 만났던 한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아이의 아버지인 할릴(Halil)이 어머니 에스메(Esme)를 납치해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에스메는 추쿠로바 지역에서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다. 오랜 역사를 거듭하면서 도전과 약탈로 다져진 호전적 유목 문화의 잔재일까. 터키에는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을 강제로 납치해서 살면 결혼으로 인정받는 풍습이 있다.
에스메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너무도 깊이 사랑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어느 날 이들의 사랑과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에스메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할릴 때문이다. 마을에서 나름대로 부와 용맹한 남성으로 인정받던 할릴은 여러번 에스메에게 청혼을 했으나 에스메의 단호한 거절로 청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자 할릴은 여자를 납치해서 강제로 신부로 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차지한다. 에스메의 옛 애인 압바스 역시 에스메를 되찾아 오려다가 할릴을 살해하고 만다. 결국 피의 복수가 시작되고 만 것이다.
할릴을 죽인 압바스는 끝내 할릴의 형제들에 의해 살해되지만 그들의 복수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에스메는 그들에게는 ‘외부인’이며 이방인이다. 따라서 할릴의 혈통인 아들 하산에게 칼자루가 쥐어진다. 거짓 소문, 마을 사람들의 압박과 독촉, 가족들의 억압으로 인해 어린 하산은 결국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만다. 이때 하산은 고작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몇 세대까지라도 대를 물리는 그들의 피의 복수극은 혈연 공동체 안에서 내부이며 동시에 외부로 존재하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부족이나 친족에 해를 입히거나 손실이 가면, 반드시 복수하고야 마는 것이 피의 복수이다. 이것은 그들의 고유 문화 속에 녹아있는 명예죄의 모습이다. 우리 가문이나 혈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살인은 정당하며, 오히려 영예롭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천륜의 거역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피의 복수이다.
최근 이라크로 간 한인들이 테러의 타깃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그리고 이라크를 차례로 정복했다. 미국은 그들의 가슴 속에 뿌리내릴 원한과 복수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까? 상처입은 그들의 가슴은 어느새 미국을, 온 세상을 테러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지구화 시대를 살면서 미국은 이제 그만 테러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그들의 얼어붙은 가슴과 원한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것만이 전쟁과 죽음으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를 되돌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샤르 케말이 ‘피의 복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