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상체를 조금 기울이며 '형제'라는 말에 힘을 싣는 시인의 눈빛이 깊다. 시집 속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갖고 여러 번 불려진 ‘형제’라는 말! 시인의 형제라는 말에는 시대와 역사가 함께 있다. 문학인 대가족시대를 산 시인의 이런 가슴 뭉클한 가족애가 나는 새삼 부럽다. 요즈음은 핵가족시대의 문학이지 않은가, 아니 가족 해체의 시기에 돌입한 문학이기도 하지 않은가.

▲ © 운영자

“3번 출구요!” 앞서 가던 남자가 교보문고 방향을 묻자 지하철 안내원의 답이다. 막 전철에서 내린 나는 그 말을 얼른 주워듣고 곧장 남자의 뒤를 따라 교보 방향으로 나왔다. 광화문 역은 언제나 혼잡하다. 지하철에서 내린 사람들은 너나없이 가야 할 노선이나 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다시 가기도 하고 이렇게 누군가를 무조건 뒤따르기도 하고…… 나는 교보에 이르러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버린 것은 물론이다. 그는 지하매장으로 향했고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마침 오늘은 대산대학문학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고 대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이시영 시인과 인터뷰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심사위원으로 식장에 참여한다고 하였다.

먼저 와 있던 시인은 누군가와 휴대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 나도 아는 작가나 편집자였으리라. 시선 출판기획에 관한 이야기일까? 조태일, 신경림, 정희성 등의 시인 이름이 거론되었다. 짐작에 공저출판 제의를 받고 있는지 이를 극구 사양하는 사뭇 부드럽고 나직한 어투다. 사실 이런 편안한 시인의 모습은 내겐 좀 낯설다. 나는 언제나 시인을 과묵하고 예민하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뵐 때마다 좀 어색하고 어려워했던 터이니. 시인은 청보라빛 스웨터에 수를 놓은 듯한 화려한 다이아몬드 무늬를 살짝 감춘 녹두색 코르덴재킷을 걸치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고 있다. 오른 편 옷걸이에는 시인의 것으로 보이는 감색 목도리가 곁들여진 모직코트가 반듯이 걸려 있다. 섬세해진 옷차림이다. 우여곡절을 겪었던 이십여 년 동안의 창비 시절을 청산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어가니 이제 자유인이라는 여유가 멋스럽게 스며든 것일까. 나는 슬며시 편안해졌다.

이내 시인의 통화는 끝나고 안부를 묻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많아져서 책을 많이 읽게 되고, 젊은 시인의 시도 꼼꼼히 찾아 읽어 좋은 시를 발견하는 기쁨도 크다고 한다. 최근에 출간된 『은빛호각』도 상당부분 퇴직 후 씌어진 것이라니 퇴직 기념시집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은빛호각』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산문형식의 자전적 시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집에는 우리 문학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런 일화를 소재로 한 동기가 궁금해졌다.

“특별히 무슨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한가한 시간을 갖고부터 시는 그냥 온다. 그것들은 시간의 퇴적층에서 살아난다. 지나간 이야기들이 나를 통과해서 시로 간다. 송기원의 윗도리(정확하게 하늘색이었다고 한다)가 벽에 걸린 채 활짝 웃는 그 모습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다. 과거 이야기지만 지금 현재에 선명하게 살아난 이야기이다. 어느 날 불쑥 화석처럼 발굴된 것이 아니라 항상 가슴 속에서 생것으로 존재하는 그런 형상이었기 때문에 시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시집은 나 혼자 썼다기 보다 송기원, 이문구, 신경림 등 지난 시대를 함께 산 문학식구들이 같이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에는 이 사람들이 모두 숨쉬며 산다. 그들은 남이 아니다. 내 형이며, 동생이기도 한 형제들이다. 몇몇 유명을 달리한 사람조차도 여전히 내게는 살아 있다.”

상체를 조금 기울이며 ‘형제’라는 말에 힘을 싣는 시인의 눈빛이 깊다. 시집 속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갖고 여러 번 불려진 ‘형제’라는 말! 시인의 형제라는 말에는 시대와 역사가 함께 있다. 문학인 대가족시대를 산 시인의 이런 가슴 뭉클한 가족애가 나는 새삼 부럽다. 요즈음은 핵가족시대의 문학이지 않은가, 아니 가족 해체의 시기에 돌입한 문학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 시대는 이미 가난을 함께 겪으며 불의에 맞서 의기투합하던 공동체로서의 문학 시대는 아니다. 다수의 젊은 문학인들은 해체라는 담론을 변주하면서 고독과 소외라는 달콤쌉싸름한 자아를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그들 중 하나가 혹 나인 것은 또 아닌가. 잠깐 숙연해지는 마음을 밀치며 좀 장난스러운 질문을 해보았다. 시집이 출판된 뒤 각 신문사에 인터뷰 기사가 많이 실렸는데 시집 속에 등장하는 김사인, 송기원 등 실제 인물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기대 밖으로 대답은 싱거웠다. “뭐 별 할 말이 있겠어? 그냥 웃기만 하지.” 지난한 세월을 함께 보내며 우리 문학사를 일구어온 형제들은 지그시 서로를 음미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그 시절을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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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시를 처음 의식하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라고 한다. 그 시절 막연하게 자신이 자신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는데, 혼자 전라선 기적소리를 들으며 미지에 대한 동경과 자신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시심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본격적으로 시를 접하게 된 것은 전주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이다.서정주를 가장 처음 읽었고 이어 서라벌예대 시절 김수영을 탐닉했다. 서정주의 농경생활이 집약된 전통적 정서와 이에 상반되는 김수영의 도회적 감수성은 문학 공부에 있어서 상승작용과 반작용의 역할을 서로 해주었다. 김수영 산문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롭다. 특히 「생활현실과 시」에서 말하는 시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되풀이되는 진실이라고 강조한다.

시인의 시적 환경은 50∼60년대 우리 나라의 활기찬 농경사회의 체험과 70∼80년대 서울 상경으로 경험한 도시의 문인공동체 속의 삶이라고 한다. 이 시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역사적 회오리 속에 깊이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들이 모두 문학적 토양이 되었다. 이렇게 농촌과 도시라는 환경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었던 시인의 개인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회고한다.

시인의 시집 『사이』 후기에는 “언어여! 소리나 빛깔 말고 그 그늘 같은 것도 좀 거느려 다오”라는 대목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좋아해서 베껴 쓰며 외우기도 했는데 시인이 말하는 언어의 그늘이란 무엇인지 직접 듣고 싶었다.

“언어의 그늘이란 마음의 결이다. 나무나, 하늘 등 어떤 언어를 쓸 때 어느 시인이 쓰느냐에 따라 그 시인이 담겨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단어에 드리워지는 시인의 아우라 같은 것. 시대적 상황과 정서적 감흥이 어우러지고, 시인의 영감이 들어가 음영을 이루고 있는, 가령 신경림의 「목계장터」는 언어의 음률 속에 떠돌이의 그늘이 담겨 있는 좋은 예이다. 또 한 예로는 김지하의 「빈산」, 「불귀」 등이 있겠다. 좋은 시란 이런 언어의 그늘을 거느려야만 한다. 서정주 시 「동천」의 마지막 구절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에서 보이는 서늘하고 빼어난 기상은 그 얼마나 큰 그늘이냐.” 언어의 그늘! 나는 이번 『은빛호각』에서 그 그늘을 보았다. 시어 하나하나에 비치는 그늘이 아니라 시 전체에 드리워진 그늘이 그것이다. 일상어로 씌어진 산문임에도 이를 읽고 나면 기쁘고 슬프고 애련한 익살이 드리워진 그늘에 가슴이 서늘하다. 시인의 ‘형제’라는 말에는 역사와 문화라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응축과 상징이라는 시쓰기의 일반성을 외면한 산문 형태는 자칫 시가 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은빛호각』 속 이야기는 다 읽는 순간 한편의 산문이 그대로 하나의 응축된 시어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선 암울한 역사적 현실조차도 시인에겐 인정(人情)이란 그늘로 시가 되고 만다. 시인은 시의 정형을 넘어서 시를 찾아낸 것이다.

시인의 시에서는 산문형의 시뿐 아니라 이전 시집에서부터 쭈욱 보여주고 있는 짧은 단시에서도 단순한 일상이나 풍경이 어떤 한 순간에 정지되어 제시되는데 이 순간들은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이 순간들은 또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순간은 만난다기보다 발견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실제보다 더 실제로운 것이 아닌가. 이는 삶의 한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으로 시인에게 있어서 이것이 시의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말씀이다. 이는 시선의 명료성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시인의 타고난 감각이리라.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를 묻는 질문에 시인은 다시 김수영의 예를 들었다. 김수영은 좋은 시의 정의를 ‘사상이 새로운 언어의 기술을 통해서 자유를 행사한 시’라고 하였다. ‘새로움은 자유다’.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좋은 시에 대한 정의이다. 각 문예지마다 20여 명의 시인이 시를 발표하면 그 중 한두 사람만이 새로움이 보인다. 새로움이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개성만을 내세운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는 숫자적으로 많아진 시인 아마추어리즘이 난무하다. 해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난해한 시들이 판을 친다. 진정한 해체적 해체, 무의미 시, 참다운 시는 의미를 교란시키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의미를 향하여 가면서 의미를 탈락시키는, 김수영의 「꽃잎」, 「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구성이 우선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기본적인 구성이 이루어진 후에 파격이 가능한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파격에서 오지만 그 밑그림은 완벽한 구성이다.

더불어 좋은 시를 발견하고 이를 소개하는 비평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시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살아서 호흡을 한다. 산소를 만나듯 독자를 만나서 성장하기도 한다. 이런 시를 대하는 태도는 시에 대한 단순한 지식풀이로서는 안 된다. 최근 시 월간지에서 2004년 젊은 시인을 논하는 어느 평론가의 글을 보고 놀랐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이 과연 시를 올바로 소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시는 지독하게 난해하니 아무도 근접하지 말라는 엄포이기도 한 이 글을 수첩에 적어가면서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해독 불가능했다. 비평가의 독백 같은 해설은 시를 더 어렵게 한다. 비평가란 독자와 시인을 연결시키는 중개인 역할이 아닌가. 보다 쉽게 대중의 언어로 시를 안내해야 된다.”

참다운 문학을 위해서는 시인과 비평가가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갈수록 왜소해지는 문학에 대중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시인은 작품다운 작품을 쓰고 비평가는 비평다운 비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상식을 존중하는 대중의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오늘날 문학현실을 보는 명민한 시각과 문학에 대한 참된 애정은 30여 년이 넘는 문학인생을 대변하고 있었다.

▲ © 운영자

처음 문학에 입문하는 문학지망생들에게 도움말을 부탁하였더니 “마음을 다하여 하여라”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은 독서가 부족하고 마구잡이 습작에만 몰두한다. 우리 현대시의 출발지점부터 읽어나가야 한다. 김소월은 근대화 이전의 농경생활의 집약된 정서, 우리 민족의 원형체험을 관통하고 있다. 21세기의 젊은이들에게도 김소월의 정서가 유전자 속에 들어 있다. 이런 선험적 체험을 독서 훈련을 통하여 끌어내야 한다. 이렇게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간파해야만 진정한 한국문학의 전통과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마음을 다해서 쓰고 비평가는 마음을 다해서 논하며 선생은 마음을 다하여 가르쳐야만 좋은 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문학뿐 아니라 정치는 물론 세상사 모든 일에 해당하는 이치이리라.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았더니 특별한 계획은 없고 언제나 그렇듯이 시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안경 너머로 좀 더 깊어진 듯한 눈매, 언제 보아도 섬세하고 가지런한 손, 그 모습은 상대를 좀 어렵게 하기도 하지만 한번 그 드문 웃음이라도 지으면 치아가 환히 들어나면서 ‘무슨 긴장?’하는 소박한 다정함이 얼굴 가득 번진다. 그러나 그건 아주 짧은 순간 뿐, 이내 시인의 미소는 싹 사라지고 다시 상황은 조심스러워지고 만다. 그러나 나는 안다. 자연과 미물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약하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깊은 형제애가 시집 속속들이 스며있듯 굳게 닫힌 시인의 표정 속에는 필라멘트처럼 가늘게 떨면서 강렬한 빛을 발하는 빛나는 감성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이내 나의 조심스러움은 깊은 신뢰로 바뀐다. 평생 시를 살아내고 있는 시인에게서 보이는 단호한 정직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건강했으면 좋겠다. 창비 마포 시절 사무실 아래 통닭 집에서 맥주를 기분 좋게 쭉 들이키곤 그 섬세하고 가지런한 손으로 맥주 잔을 탁자에 탁! 하고 내려놓던 모습이 좋았다. 그 소리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탁자조차도 은근히 놀라기도 했지만 그 분명한 생기가 즐거웠다. 분홍 와이셔츠를 가끔 입던 그때처럼 건강해서 형제들과 건강한 시도 쓰고 건강한 삶도 살고 제자들에게 건강한 가르침도 주길 하는 마음뿐이다. 이야기가 다 끝나갈 무렵 곧 이어지는 시상식에 참여할 소설, 시, 비평, 희곡 등을 심사했던 심사위원들이 들어왔다. 시인의 형제며 후배인 우리 문단의 가족들과 섞이는 이시영 시인을 보니 좀 흐리긴 하지만 거기에도 형제라는 그늘이 어른거렸다.

내가 가는 시의 길은 어떤 것인가. 내 시에도 이런 그늘이라는 것이 있을까. 아까 지하철에서 듣고 따라온 3번 출구…… 시의 길도 이처럼 누군가 찾아낸 길을 나도 주워듣고 편하게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내가 두리번거리며 찾았다고 생각하는 나의 길이 사실 누구나 다 가고 있는 길인 건 아닐까.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고 없는 길을 만들며 가는 것은 길을 사는 것이리라. 시상식을 지켜보면서 오늘 새롭게 꽃다발을 받는 젊은 학생들 속에 십 수년 전의 내 모습도 떠올려 보았다. 시의 출구라니? 모쪼록 내 시가 출구 없는 광산에서 광맥을 캐내듯 길을 사는 시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길의 언어들에게 형제가 아니라도 좋으니 사람이라는 그늘만이라도 드리워지길 바라면서…… 시상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반백이 된 시인의 뒷모습을 두고 혼자 슬그머니 식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