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글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가 울퉁불퉁하고 뱃머리가 비뚤어지고 돛대가 휘어졌을지라도 키는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스무해 전, 서울살이를 할 적에 한 단체의 송년회장엘 가서 민망스러운 일을 보았다. 반백의 머리에 주름살이 깊어지기 시작한 한 낡은 감색 코트 차림의 낯선 남자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손을 내밀고 내 작품을 잘 읽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죄송스러워 두 손으로 그 남자의 손을 감싸 쥐며 몰라 뵈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선배 소설가였다. 스무살을 전후해서 그의 소설을 한 편 읽었었다. 사상계를 통해 등단했고 실존주의 영향을 받은 작가였는데 이미 오래 전에 활동을 중단했다.

그는 내 옆의 작가 두엇과 악수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하고나서 젓가락을 들고 차려진 음식을 부지런히 먹었다. 그의 감색 코트의 깃과 어깨에 떨어져 있는 흰 비듬이 눈에 띄었다. 나는 몇몇 어른 작가들과 선배 작가들에게 인사를 하고 맥주 한 잔을 하고 나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등을 약간 구부린 채 달게 먹고 있었다. 그에게 알은 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서글픔이 괴었다. 먹을 만큼 먹은 그는 혼자서 출입구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울적함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이차 자리에 가서 소주를 미친 듯이 들이켰고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돌아왔다. 멀지 않은 훗날의 내 모습이 그러하지 않을까. 절망이 땅거미처럼 쏟아졌다.

도제 양성을 해놓은 바도 없고, 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고 찬양해주는 독자도 없고, 권력의 한 복판에 서 있지도 못한 까닭으로 얼굴 훤하고 몰긋몰긋한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대접받을 일도 없을 나 아닌가. 아무도 알은 체하지 않는 이 잔치판 저 잔치판을, 초상집 개처럼 맛깔스러운 음식 냄새를 찾아 기웃거리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자 진저리쳐졌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을 가진 것만 살아남는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 갖추고 있어야 시간을 가진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현재만 있고 미래가 없는 것은 소멸된다. 아직은 나에게 확실한 시간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9년 전 서울을 버리고 천리 밖의 전라도 장흥 바닷가에 토굴을 짓고 칩거하듯이 살기 시작했다. 확실한 미래를 가져보겠다는 몸부림으로. 그 이후 초상집 개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어떠한 자리에도 나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한데 그 작정을 어기고 지난 해 서울의 한 송년회에 나갔다. 서울 사는 큰아들 내외가 손자를 낳아주어 아직 새빨간 그놈하고 첫대면을 하려고 갔다가 기분 우쭐해진 김에 그리운 얼굴들 마주 보며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들른 것이었다.

한데 그 자리에서 이미 중년이 된 한 소설가가 나를 모른 체했다. 그로부터 오만의 냄새가 날아왔다. 그가 알은 체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알은 체를 하며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술만 마셨다. 이십년 전의 감색 코트차림의 선배 소설가의 슬픈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중년 소설가는 한때 문학잡지 기자 생활을 한 바 있었다. 나는 그 잡지사엘 몇 차례 드나들었고 그와 두어 차례 차를 마시기도 했었다. 때문에 그가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알은 체하지 않을까. 일차 자리가 끝나고 이차 노래방 기기가 있는 자리로 옮겨 간 다음에도 그는 마찬가지로 그랬다.

내가 문학의 권력 한 복판에서 맴도는 사람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그렇게 모른 체했을까.

생각하니 나도 참 미욱하고 소졸하다. 마당이 비뚤어져 있을지라도 그 마당 괘념하지 말고 내 장구나 똑바로 치면 될 것을, 뱃머리 비뚤어지고 돛대 휘어졌을지라도 내 키만 제대로 잡으면 될 것을, 왜 그의 오만을 토굴까지 보듬고 왔단 말인가. 쯧쯧, 내 소졸이 내 순하고 착한 양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