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원숙한 향기와 새로운 풋풋함이 교차한 계절이었다. 모든 것이 기운을 쌓아두는 겨울에 문단 중진의 힘은 빛났다. 또한 막 ‘작가’로 시작하는 신인들의 등단 소식으로 한해를 시작한 계절이기도 했다.
고은, 김병익, 김원일, 황석영 씨 등 중진 작가들의 신작 출간 소식이 겨울 문단을 풍요롭게 했다. 김원일(63) 씨가 펴낸 『물방울 하나 떨어지면』(문이당 刊)은 작가의 여섯번째 소설집이다. 그간 장편에 주력해 온 작가가 12년 만에 출간하는 창작집 소식이라 반가운 마음이 무엇보다 앞선다. 묵직한 중단편 다섯 편 모두 군살없는 문체의 감동, 사실적인 이야기의 힘의 위력을 보여준다. 대개 몸 혹은 마음에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과 화해하는 얘기들이다. 소설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담담하게 서술된다. 작가의 주제의식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대목도 조용한 공감을 끌어낸다. 표제작 「물방울 하나 떨어지면」의 몇 구절. “물방울 하나가 고요한 수면에 떨어지면 그 중량으로 파문이 겹으로 커지며 넓게 퍼지다가 스스로 넉넉한 물에 섞여 자취를 감춘다. 그 이치와 같이 베풂이나 선행, 우리네 삶 자체도 물방울 하나이리라.”
김병익(66) 씨가 자전적 산문을 묶은 『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 발행)을 출간했다. 기자였고 편집자였으며 현장비평가로 활동해 온 그의 삶을 정리한 글모음이다. 김씨는 삶을 돌아보는 것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세대에 속해 있다. 산문은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 중 가파르던 한 시대의 증거물이 되었다. 다양한 주장을 폭넓게 수용하고 세대간의 조화로운 교체를 자연스럽게 실행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믿는 김씨의 신념의 근거와 발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이다.
고은(70) 시인의 만인보 여정은 계속된다. 『만인보』 16～20권을 내면서 전 30권의 ‘고지’에 가까이 다가섰다. 두달 만에 “쏟아졌다”는 719편의 시는 한국전쟁을 주된 배경으로 삼았다. 전란으로 폐허가 돼버린 땅덩어리에서 이름없는 사람들의 눈물과 상처를 보았고, 그것을 시로 옮겼다. 이승만, 김일성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뿐 아니라 만수 할머니, 공대순 영감 등 피난민의 군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고 시인은 『만인보』 출간과 함께 시낭송 행사와 문학강연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영국 연수를 준비하고 있는 황석영(61) 씨가 『청소년을 위한 장길산』(전10권)을 펴냈다. 이 작품은 역사소설 『장길산』을 청소년용으로 개작한 것이다. 1천여 명의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담은 원작을 주인공 장길산 중심의 이야기 전개로 바꾸었다. 『해리 포터』 5부가 휩쓸었던 아동출판 시장에서 초판 1만5천세트가 무리없이 소화되면서 작가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겨울은 신춘문예의 계절이기도 하다. 2004년 1월 1일 신문들은 일제히 문단에 신인을 내보냈다. 열병을 앓으면서 한해를 기다려온 문청들에게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동시 당선한 허혜란 씨 등 1990년대 이후 약진한 각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이 올해도 강세를 보였다.
새로운 세기에 문학은 문화의 주류에서 언더그라운드로 몸을 옮기지만, 기이하게도 해마다 신춘문예 응모자는 늘어난다. 올해도 그러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은 그러나 대개 “오늘날 문학지망생은 선배 문인의 작품을 읽지 않고, 영화와 인터넷 등에 몰두한다. 그들이 의식하는 것은 앞선 문학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매체”라고 지적했다. 몇 가지 주제에 집중됐던 1980～90년대의 글쓰기와 달리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깊이 있는 성찰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문학의 오랜 주제 의식 대신, 일상에 침잠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심사위원들은 설명했다.
이 겨울은 한국 문단에 이름을 남긴 작가 두 명을 의미있게 기렸다. 2003년 2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소설가 이문구의 1주기를 맞아 『그리운 이문구』(중앙M&B 발행)가 출간됐다. 1977년부터 업무용 다이어리와 대학노트에 짧은 메모 형식으로 쓴 일기 중 2년 여 투병의 기록과 이경철 문예중앙 주간의 회고, 문우 박태순, 한승원, 황석영, 김정환 씨 등이 돌아본 작가의 삶과 문학세계가 함께 묶였다. “처에 의하면 7월 초 늑막에서 물을 1천5백㎖ 빼던 날, 처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축구가 곧 인생이다. 축구도 공 팔자(八字) 놀음이 아닌가 생각을 하였다.” “(9ㆍ11 테러는) 세계의 경찰국가요 재무국가인 미국의 허상이다.” 곧 떠날 세상을 붙들지 않는 마음, 스포츠의 순수한 열정에 인생을 대입시키는 작가의 성찰, 시사 문제에 관한 지적 등 죽음 전까지 펜 끝을 날카롭게 갈았던 작가의 엄정한 태도가 생생하다.
시인 김남주의 10주기 추모행사도 활발했다. 기일인 13일과 다음날인 14일 전남 해남에서 김남주 추모문화제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가 열렸다. 강대석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집필한 『김남주 평전』(한스미디어 발행)도 나왔다. 억압의 시대에 시가 곧 무기였던 김남주의 한 생애와 그의 문학세계가 정리됐다. 평전에서 소개된 ‘옥중 연서’는 김남주의 예술관이기도 하고 그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이 조국에, 날 낳아주고 날 키워준 이 조국의 논과 밭에, 나는 시인으로서, 한 여인의 지아비로서 부끄럼 없이 내 순결을 바치고 싶다오 …… 내가 말하는 순결성은 혁명적인 휴머니스트의 그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오.” 혹독한 겨울 추위에 설 수 있는 날카로운 시의 날을 벼리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시인의 믿음에 숙연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