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_시인. 1921년생. 시집『십이음계』『북치는 소년』『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등. 1984년 사망.
필자 선생님께서 작고하신 지도 벌써 20년이 되어갑니다. 선생님께서는 시 「대화」에서 죽음은 “모짜르트를 못 듣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모차르트를 못 듣고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김종삼 모짜르트를 들을 몸이 없어서 모짜르트 없이도 잘 지냈네. 덕분에 소음도 듣지 않아서 아주 좋았네. 모짜르트는 생전에 들을 만큼 들었네. 이제 소리는 침묵 하나로도 족하네.
필자 시 「그날이 오며는」에서는 “모짜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되어,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 죽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그날은 왔다가 가버렸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무엇이 되셨습니까?
김종삼 무엇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일생동안 “바닷가에 매인 작은 고깃배”(「漁夫」)였네.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 풍랑이 이는 먼 바다로 노를 저어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네. 그러나 평생을 매어 있었네. 모차르트의 플루트 가락이든 끝없는 평야든 뭉게구름이든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든 이 매인 자리에서 무한히 앞이 트인 공간으로 끝없이 나아가고 싶었네. 무한한 공간을 향해 가는 것은 무엇이든 다 상상해 보게. 자네가 상상하는 그것이 지금의 나의 모습일세.
필자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먼저 가신 소월 성님과 윤용하, 조지훈, 장만영, 박목월, 김수영 시인을 시에서 다 만나셨습니다. 지금은 그 분들과 함께 지내고 계시는지요?
김종삼 시 속에서 만난 그 순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네. 그 상태에서 시간은 조금도 더 흐르지 않았네. 사람들은 죽으면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가? 그들은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려고 애를 쓴다네. 그렇지만 그들이 지상에 존재하는 시간은 오로지 산 사람들이 그들을 머리와 가슴으로 떠올릴 때뿐이야.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과 같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동안, 가슴이 아려지는 동안만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거지. 노숙자처럼 거할 곳을 찾아다니지만, 거할 곳이라고는 산 사람들이 드물게 기억해 주는 그 짧은 시간뿐이지. 산 사람들의 기억이 지나가면 그들은 또 다른 장소를 찾아 헤맨다네. 그마저도 땅 위에 그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지는 거야. 말하자면 그들도 영원히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지.그 이후에 지상에 남는 것은 활자나 이미지뿐일세. 내가 소월 성님이나 윤용하 선생, 김수영 시인을 만나는 것은 오직 지상에서 그분들을 떠올렸던 순간들뿐이네. 다행히도 가장 마지막에 본 그 분들은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었네. 나는 아직도 그 순간 속에서만 그 분들을 떠올리고 있다네.
필자 선생님의 시에 나오는 아이들은 거의 혼자이거나 곧 죽을 아이들뿐입니다, 평자들은 그것이 시인과 세계와의 불화를 나타낸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 의견에 동의하시는지요.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요.
김종삼 한 마디로, 왜 불행한 어린 아이를 등장시켜서 그렇게 비관적으로 썼느냐 그 얘기지? 내 시 「소공동 지하 상가」를 보았나? 나는 아직도 쇼윈도 안에 든 여자용 손목시계를 정답게 들여다 보고 있는 두 소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네. 하나같이 얼굴이 동그랗고 하나 같이 키가 작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손목시계들을 들여다 보던 두 소녀의 가난한 모습을 떠올리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생긴다네. 그리고 내가 어떤 시(「물桶」)에서, 사는 동안에 한 일은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한 가지 한 일이 더 있어. 뭔고 하니, 지상의 불행을 겪지 않은 순수한 어린 아이를 찾아낸 일이야. 그게 누군고 하니, 바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야. 전쟁이 지나간 땅에서 아이들이 겪은 온갖 불행 속에서 그 아이를 찾아냈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바로 그 아이와 손 쥐고 가던 때야. 그렇지만 그 아이는 오직 시 안에서만 살 수 밖에 없어. 시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아이는 죽어. 상징이나 의미로 만들기만 해도 바로 죽을 거야. 그러니까 그 아이가 제 악기와 놀며 마음껏 숨쉬도록 그냥 놔두었으면 좋겠어.
필자 선생님의 시는 사리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는 광물처럼 작고 투명하고 단단한 모양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고통의 불로 스스로를 소신하여 얻어진 결정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결정체는 그것이 나오기까지의 긴 과정이 환기되는 것을 극도로 억제하려는 물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단함과 투명함 속에는 환기력이 더 큰 폭발력을 감춘 채 잠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통의 제련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선생님의 시작 방법의 비밀을 엿보고 싶습니다.
김종삼 고통을 제련시키는 과정으로서 나도 소신(燒身)을 하긴 했지, 아주 많이 했지. 소주(燒酒)로 말이야. 내가 그랬잖아. “나는 쏘주는 먹을 줄 알지만 하모니카는 불 줄 모른다”(「바다」)고.
필자 고통은 사람이 생명체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육체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제 속에다 장치해 놓은 경보장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육체에게 닥친 위험을 미리 또는 즉시 알아차리게 해서 위험을 피하거나 막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몸을 가진 생명체에게는 필연적인 것이며, 고통이 곧 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그 고통이 충분히 숙성되어 단맛이 잘 우러나온 것 같습니다. 시의 재료인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종삼 먹고살아야 하는 굴욕을 견디는 일 말고는 견딜 만했네. 생전에 벌받을 짓도 많이 했지. 고통은 그 대가라고도 생각하고 있네. 시라는 게 사는 얘기를 쓰는 거니까 벌받은 얘기를 안 쓸 수 있겠나? 그렇지만 고통스러우니 어쩌니 하고 시에다 고자질하는 건 딱 질색일세. 아 그렇게 힘들면 가서 싸우든지 울든지 쏘주 끼고 살던지 해야지 왜 그걸 미주알고주알 시에다 쓰냐고. 릴케(R. M. Rilke)가 그랬잖아. 그런 건 “아름다운 정신을 찍어서 불태우는 이른 바 언어의 도끼 같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에다 쓰는 언어는 “도끼가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깊은 수림 속에서 홀로 숨쉬고” 있는 “새로운 언어”일세.
필자 선생님이 생전에 꿈꾸던 “시인학교” 교사(校舍)는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습니다. 레바논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중동에 있습니다. 여러 번 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지금도 긴장이 계속 되는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장 완전도가 높은 순수시인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선생님의 시에도 사회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근년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라크 사막에 시인학교 분교라도 하나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
김종삼 시인학교 강사진은 작고하신 예술가들로 구성되어 있네. 왜 작고하신 분들을 강사로 모셨느냐고? 내가 꿈꾸던 시인학교는 전쟁 이전의 레바논에 있는, 시간을 초월한 공간에 있는 학교야. 그러니까 당연히 강사진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분들이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고 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가 없어진 것은 아냐. 전쟁 이전의 아름다운 레바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레바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장소야. 시인학교는 모리스 라벨과 폴 세잔, 에즈라 파운드 같은 작고한 예술가와 레바논 골짜기를 현재처럼 가슴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힘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학교야. 아름다운 이라크의 광야와 유적들, 예수와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존재하네. 전쟁이, 살인이, 폭력이 견디어내지 못하도록 이라크 평화로운 이라크의 들판과 그 아름다움을 상상해 보게. 분노의 힘으로 그 아름다움에 광채와 불멸의 생명력이 이글거리도록 상상해 보게. 누구든 이라크 사막에 시인학교를 세울 수 있을 것이네. 그것은 산 자들의 몫이 아닌가?
필자 선생님은 한국인인데 왜 시에는 외국인과 외국 지명이 많이 나오느냐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김종삼 그것은 나처럼 유년기와 청년기를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으로 다 채운 자의 표지(標識)이네. 시대의 황무지를 벗어나 보려고 헤매는 자, 무지(無知)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보려고 떠도는 자의 표지일세. 그때 내 무지는 거기서 볼 것과 들을 것, 상상할 것들을 조금이라도 얻어 허기를 때워 보려고 애를 썼지. 그래서 허기를 때우긴 때웠냐고? 시 「앙포르멜」에서 고백한 그대로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