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자라는 아이들에게 책은 중요하고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왜 필요하고 중요하다면 얼마나 중요한가?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회의 책무이고 모든 부모들의 의무이자 관심사이다. 그런데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우는 것인가? 이 ‘잘 키우기’에서 책은 꼭 필요한 물건이고 성장의 필수도구일까? 책은 아이들이 크는 데 무엇을 기여하고 무슨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아주 어려서부터 책과 친구가 되어 자란 아이들과 그러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는 나중 무슨 의미있는 성장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해답을 찾는 일은 단순히 교육학자들이나 자녀를 둔 개별 부모들만의 과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모든 사회의 책무라면, 아이 잘 키우기의 방법을 찾고 집단적 실천의 프로그램을 짜는 일은 동시에 사회 전체의 과제이다. 한국 사회도 예외일 수 없다. 구약 욥기에서처럼 만약 신이 나타나 “너희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네, 압니다”라고 우리가 냉큼 대답할 수 있을까?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하느님. 아이들은 내버려두어도 제풀에 자라니까요”라고 대답해도 될까?

  내버려두어도 들판의 풀 자라듯, 무 배추 자라듯 제풀에 자라는 것이 아이들이라는 생각은 그 나름으로 일리 있는,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강력한 철학을 담은 주장이다. 잘 키운답시고 어른들이 안을 짜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뒤집어씌우다가 되레 아이들을 망치는 수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인위적 공학적 개입과 조작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장-자크 루소 같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을 잘 키우는 최선의 길이다. 방법은 무슨 얼어 죽을 방법? 그러니까 루소적 지혜는 무슨 교육공학적 방법의 제시가 아니라 ‘인위적 방법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자 ‘방법의 거부’이다.

  세계 아동문학사에 빛나는 보석 같은 작품들로 동서양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한스 크리스치안 안데르센이라면 어떤 답변을 낼까? 그의 작품 「미운 오리새끼」에는 그가 갖고 있었던 어떤 믿음 같은 것을 요약해 주는 주제 하나가 선명하게 깔려 있다. “백조는 오리의 무리 속에서 알을 깨고 나와도 여전히 백조다. 누구네 마당에서 알을 깨고 나왔는가, 어디서 자랐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백조는 백조다.” 알이 어디서 부화하느냐에 관계없이 오리는 오리로 자라고 백조는 백조로 자란다. 애당초 오리로 태어난 녀석은 공들인다고 해서 백조로 자라는 것이 아니고 백조 새끼는 오리집에서 ‘미운 놈’으로 자라도 결국 백조가 된다. 이렇게 보면 안데르센의 답변 역시 “내버려두어도”의 주장에 가깝다. 이런 생각은 요즘 생물학 일각이 내놓고 있는 유전자 결정론과도 상당히 통하는 데가 있다. 물론 「미운 오리새끼」의 주제는 무슨 철학이나 과학을 담은 주장이 아니라 안데르센 자신의 성장의 비밀을 요약하는 경험적 진실의 은유라고 말해 주는 편이 더 온당할 터이지만.

  1992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지금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로 퍼져나가고 있는 ‘북스타트(Bookstart)’ 운동은 아이들을 잘 키우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그 ‘잘 키우기’에 사회 전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적 모색으로부터 나온 실천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처음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은 아주 간단하고도 단순한 어떤 한 가지 생각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아기들에게 책장난감을 쥐어주고 책과 놀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 아기들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로 자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사회운동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게 맞는 생각인지 아닌지를 검증해보아야 한다. 생각은 그렇게 해서 ‘가설’이 되고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진이 투입된다. 연구 대상은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 생후 6～7개월밖에 안 된 아주 어린 아기들이다. 꼬맹이 ‘아기들’에게 책장난감을 쥐어주고 책이라는 물건과 친하게 해주었을 경우 과연 그 아기들이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로 자라는가를 보자는 것이 연구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북스타트 운동은 지금 65만 명에 달하는 0세(우리 식으로는 1세)의 영아인구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여기서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영아인구 전원을 대상으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위해 영국 사회가 고안한 것은 사회단체와 기업들을 포함한 민간 부문,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들이 함께 참여하여 사회적 자원들을 조직하는 합작사업방식이다. 운동은 민간이 주도하되 필요한 자원은 민과 관이 함께 마련해서 아기들에게 일정 기간 일정량의 책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북스타트’가 이처럼 전국화의 물결을 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어려서부터 책과 친하게 지낸 아기들은 책 좋아하는 아이들로 자란다”는 ‘가설’의 타당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설이 입증된다고 해서 운동 자체를 ‘사회화’해야 할 필요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기들을 책 좋아하는 아이들로 자라게 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기와 아이들을 잘 키우는 데 책이라는 물건이 꼭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필요하고 중요하다면 어떻게 중요한가라는 질문이다. 한 사회의 집단적 노력과 자원을 모으는 사회운동의 경우 그 수혜 대상은 특정의 산업영역, 계층, 집단 아닌 ‘아이들 전원’이며 그 목표는 ‘모든 아이들 잘 키우기’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국 북스타트가 전국적 실시를 보게 된 것은 이런 질문, 관심, 목표에 대한 긍정적 답변들이 확보되고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북스타트의 목표는 아이들을 단순히 책 좋아하게 키우자는 협소한 이해관계에 묶여 있지 않다. 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이 성장의 도구로서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북스타트는 아기들에게 책장난감을 던져주고 “얘야, 이것 가지고 놀아라”고 일러주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책을 읽기는커녕 말도 못하고 못 알아듣는 아기들에게 책이라니?

  북스타트가 아기에게 주는 그림책은 아기만을 위한 장난감이 아니다. 그것은 아기와 부모, 아기와 양육자들 사이의 친교와 소통, 상호반응과 교감, 행복과 즐거움의 공유 같은 극히 중요한 사건들을 매개하고 촉진하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이 수단의 활용에서 부모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그림책을 펴놓고 엄마가 짚어주는 그림들, 아빠가 들려주는 재미난 소리와 이야기들은 아기가 세상에서 대하는 원초적인 사물의 질서이고 최초의 기표이며 외부 세계에 대한 최초의 접근통로이다. 생물학의 용어를 빌리면, 부모가 들려주는 소리들과 이야기 하나하나는 아기에게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표현력을 발현시킬 ‘소리의 줄기세포’와도 같다. 또 부모-아기 사이의 친교의 형식들은 아기가 자라면서 세상과 맺게 될 관계 방식에 심대한 영향을 줄 원초적 경험의 장이 된다.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와의 상호작용이랄 때, 책은 이 상호소통과 교감을 매개하고 촉진하는 극히 편리하고 값싸고 유용한 도구이다.

  또 이런 질문을 해보자. 우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가? 아니, 어떻게 자라는 것이 아이들 자신에게 좋을까? 세상에 나 말고 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 타인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연민을 발동시킬 줄 아는 가슴을 가진 아이, 어휘력이 풍부하고 뛰어난 표현력과 소통능력을 가진 아이, 창조적 상상력이 넘치고 다른 아이들과 잘 협력하고 타인의 감정을 읽을 줄 알고 모든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아이콘들을 잘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아는 아이, 독서력이 뛰어난 아이 - 이런 아이가 있다면 그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아이’일까? 그는 아이들도 원하지 않는 그런 아이일까? 만약 이런 아이들을 키우고자 할 때, 아기 때부터의 책과의 친교가 큰 도움이 되고 책이라는 물건의 매개가 크게 요긴하다면 책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북스타트는 “내버려두어도 아이들은 자란다”는 주장의 진실을 전면 부인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으면서 “내버려두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프로그램이다. 북스타트는 성장의 비밀을 다 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방법과 자원의 사회적 공유를 시도한다. 그것은 이른바 ‘영재교육’이나 ‘천재교육’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영아들을 상대로 한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적용을 단연 배격한다. 북스타트는 오리를 백조로 키우자는 시도가 아니라 오리는 가장 오리답게, 백조는 가장 백조답게 키우자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기와 부모가 그림책을 놓고 함께 깔깔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이야기하는 행복과 즐거움의 프로그램이다. 이 즐거움이 아기에게 성장의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