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인천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때는 기차역이었다가 이제는 전철역으로 바뀐 동인천역을 알 것이다. 그 역 앞쪽의 대로변을 따라 노점 장사꾼들이 자리를 잡곤 하는데, 사정은 오랜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요즈음과는 달리 손수레에 책을 가득 벌여 놓은 채 싼 값에 책을 파는 아저씨도 있었다. 기특하게도 아주 어릴 적 소풍을 간다고 해서 받은 용돈으로 무장한 채 그런 아저씨를 찾아가 흥정을 벌인 끝에 세 권의 책을 샀다. 그 책들 가운데 하나가 깨알같은 글자에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는 『서유기』였다. 그 『서유기』에 푹 빠져 며칠을 보내던 그 시절이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도 그때 읽던 『서유기』가 기억에 새롭지만, 그동안 흐른 세월을 따져 보니 40년도 넘는다. 이처럼 4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그래, 무엇보다도 『삼국지』를 읽었지. 『삼국지』야 판본을 바꿔 가며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지. 하지만 『서유기』를 다시 만날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임홍빈 씨가 번역한 완본 『서유기』(문학과지성사, 2003)와 만나게 된 것이다. 모두 10권의 책으로 된 완본 『서유기』와 마주하고 보니 어린 시절에 읽던 『서유기』가 새삼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손오공, 삼장법사, 저팔계, 사오정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아니, 그들이 아니라 내가 변해 있겠지. 그동안 변한 나의 모습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금『서유기』에 빠져들었다. 하루에 대략 한 권씩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손오공, 삼장법사, 저팔계, 사오정의 이야기에 눈과 마음을 주다 보니,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때 어느덧 다섯 권을 독파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내 뜻대로만 되겠는가? 부득이 읽기를 중단하고 밀린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이 너무도 궁금하여 제 5권을 마친 다음 제 10권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물론 결말이 어떤가를 익히 알면서도 마지막 권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그런데 결말 부분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약간 다르지 않은가. 81가지의 환난에도 불구하고 불경을 얻기 위한 오랜 원정을 무사히 마친 우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성불(成佛)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여래부처에 의해 삼장법사와 손오공은 각각 전단공덕불과 투전승불에, 저팔계와 사오정은 각각 정단사자와 금신나한에 봉해진다. 즉, 삼장법사와 손오공만이 문자 그대로 성불을 한다. 이러니 저팔계가 여래부처에게 하는 불평이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삼장법사야 당연히 성불할 인연을 타고났다지만, 그의 제자들에게 어찌 똑같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가.

이런 의문은 물론 몇 주 후에 6권서부터 9권까지, 그리고 10권에서 전에 읽지 않는 부분을 읽는 동안 풀리게 되었다. 놀랍게도 망나니였던 꾀돌이 손오공의 인물 변화가 뚜렷하게 잡힌다. 즉, 그는 500년 동안 억눌려 살던 그를 구해 주었기 때문이라든가 ‘긴고아주’가 무서워 삼장법사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에 우러나와 그를 모시는 인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손오공은 성격 변화가 없는 ‘평면적 인물’이 아니라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는 ‘입체적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반면 저팔계나 사오정은 비록 삼장법사를 끝까지 수행하지만 툭하면 다른 마음을 먹거나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이러니 어찌 보상이 같을 수 있겠는가.

물론 심성이 올곧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점에서 삼장법사는 성불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유기』를 읽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진하고 못난 사람처럼 보이는 이가 바로 삼장법사이다. 심통 사나운 저팔계의 말에 넘어가 가장 믿을 만한 제자인 손오공을 박대하거나 상황 판단을 잘못하기도 하고, 툭하면 겁에 질려 울기나 하는 등 도대체 독자를 안타깝게 하는 인물이 삼장법사이다. 아무튼, 스승의 판단이 어떻건, 또 스승이 박대하건 말건, 손오공은 온갖 환난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 문제는 손오공이 아무리 머리와 재주가 비상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서유기』전편을 통해 손오공이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거의 예외 없이 조력자가 있게 마련인데, 대부분의 경우 관세음보살이 그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설정은 아마도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고 해도 남의 도움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도덕적 교훈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울러,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환난에서 구제해 주는 ‘자비’의 보살이라는 불교적 믿음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서유기』를 읽는 동안 이 이야기의 특징이 또 하나 감지된다. 5권까지 읽고 나서 10권을 읽는데도 이야기의 맥을 짚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오늘날의 소설이야 한두 장(章)만 건너뛰어도 맥을 짚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이처럼 건너뛰어도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점은 현대 소설의 관점에서 본다면 흠이 될 수 있겠지만, 무려 10권이나 되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줄기차게 읽어나가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서유기』의 흠은 흠이 아닌 장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 『서유기』를 읽다 보면 손오공이든 누구든 누군가의 입을 빌려 앞서 전개된 이야기를 요약해 주거나 현재의 사건이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리하여 제 아무리 중간에 끼여든 독자라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줄기차게 이야기의 전개에 눈과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요약이나 해명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해답은 간단하다. 한두 문장 건너뛰어 읽으면 된다.

따지고 보면, 10권의 『서유기』를 도합 20일도 안 되는 시간에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임홍빈 씨의 유려하면서도 충실한 번역 때문이었다. 유려함이야 몰라도, 한문을 모르거나 한문을 안다 해도 원문을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의 번역이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번역이 쉽지 않거나 불가능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 이에 대한 주석을 통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였는가를 밝히고 있는데, 바로 그런 주석을 통해 그가 얼마나 진지하고 성의 있게 번역에 임했던가를 확인할 수 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뛰어난 번역으로 독자에게 『서유기』와 제대로 만날 기회를 제공한 임홍빈 씨에게 우리 모두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꼬투리를 하나 잡을 것이 허락된다면 제자들 가운데 특히 손오공이 스승인 삼장법사 앞에서 자신을 칭할 때 “손 선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익살을 담은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긴 하지만, 감히 스승 앞에서 자신을 ‘선생’이라고 칭하다니? 중국어 - 특히 『서유기』가 창작될 당시의 중국어 - 의 관행을 몰라서 거는 트집일지 모르지만, 익살로 이해하기에는 거북스러운 느낌이 드는 때가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나이든 지금 『서유기』를 읽으면서 깨닫는 바를 어린 시절에는 물론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소설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만은 변함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지금 계산해 보니 소풍을 갔던 인천의 문학산과 동인천역까지는 10km도 넘는다. 집에서 학교까지, 학교에서 문학산까지, 문학산에서 동인천역까지, 그리고 동인천역에서 다시 집까지 - 걷고 또 걷는 일이 실로 열 살도 안된 어린아이에게는 ‘대장정’(大長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대장정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서유기』였고, 지금 역시 그와 같은 재미와 흥미를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대장정’도 마다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