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2004년 1월 5일 오후 3시, 바다날씨는 맑았다. 설악산이 수평선에 잠겨갔다. 저녁을 먹을 무렵 사위는 바닷물만 출렁였다. 올해 14살 되는 아들과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몇해 전부터 나는 아들과 조촐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왔다. 나에겐 아버지 등을 밀어주던 추억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울타리 너머로 여름방학의 긴긴 여름해가 넘어갈 무렵, 목수건을 들고 영랑호로 어슬렁어슬렁 목욕하러 가던 저녁은 늘 그리운 풍경이다.

두만강구 위 자루비노항에서 중국으로 들어간 뒤 5일 만에 이도백하에 도착했다. 훗날 한 아이와 백두산에 가는 그의 모습을 미리 보면서 나는 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는 내가 한켠 생의 이별에 관한 예행연습을 갖는 것 같았다. 두께 1미터가 넘게 언 천지의 물빛을 감춘 하늘,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 아들의 긴 그림자, 2천미터의 고산지대에서 본 눈부신 햇살, 장백폭포가 두 갈래로 떨어지는 곳. 부자는 참으로 낯선 곳에 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인성을 가지고 보편적인 길로 걸어가기를 바란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과 관련된 것은 아버지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접어두고 말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나는 중학생의 작은 몸을 백두산 온천에서 보았다. 아들은 더 성장해야 하지만 그 모습이 아버지의 눈에는 또 다른 자신이 어디선가 놀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였다. 남들 앞에서 사랑받고 조명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소년 특유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인생, 여자, 가족, 분단, 자연 등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전해주었다.

중국 동북삼성은 주로 석탄을 때는데 백두산 아래 첫 마을인 이도백하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어디선가 석탄 연기냄새가 났다. 6월 백두산이 제일이니 그때 오라고들 하는데 화산지대의 새싹과 잎사귀가 피는 백두산 정경이 상상되는 바가 있었다. 이도백하의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미인송호텔 마당에 나가 솔밭 어둠속에서 눈을 밟던 일, 아기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는 어머니상 앞에서 우리는 온몸에 파고드는 추위를 느꼈지만 추위가 곧 추억이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날 열엿새의 설경 속 달밤은 참으로 조용했다.

이튿날 설령차를 타고 백두산을 올랐다. 바람이 세차고 차가워 몸이 흔들렸다. 그런 강풍은 난생 처음이었다. 천지를 중심에 둔 원형의 둥근 산정 위 수백미터 하늘로 치솟는 눈보라는 신령스러웠다. 북한 너머에 펼쳐져 있는 산맥들이 중국 쪽의 산보다 깨끗하고 날카롭고 유혹적이었다. 아마도 미답의 땅이라 그런 것일까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몸이 바람에 흔들렸다. 중국 쪽의 백두산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사람때가 묻었는가 황량해 보였다. 봄철부터 가을까지 4륜구동차들이 쉴새없이 오르내린다니 그럴만도 하다. 천지도 우리땅 쪽이 아름답고 순결해 보였다. 동해만큼 깊은 천지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훗날엔 평양을 거쳐 천지를 보러 오리라고 말해주었다. 분단과 일제시대와 간도 유민사를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이 분단의 후예임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이제 한해가 지나면 아들은 고교생이 된다. 머리가 크면 아들과 여행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소년티가 있을 때 여행을 같이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보름 전, 아들이 5년 동안 사용할 여권을 만들고자 했지만, 여행사는 4년짜리를 내주었다. 고중철(高中哲)이는 4년 뒤 군문제가 걸려 있다는 설명이었다. 얼마 뒤면 입대한다는 생각을 하니 세월이 빨리 갈 거라는 생각이 든다.

4시 반에 북쪽 산야는 캄캄했다. 석탄 공해에다 바람 한점 없는 도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두만강 건너편 북쪽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들이 모를 캄캄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 모든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을 것인데 내가 아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아들이 알게 될 것이다. 정초에 바다를 건너 백두산을 갔다 온 이 짧은 여행도 다 아버지를 닮으려는 나의 작은 바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