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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10년의 커리어를 쌓은 소설가 배수아의 변모는 그 자신으로서도 소중한 전환이겠으나, 이른바 21세기의 문을 여는 시점에서도 의미있는 징후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 된다. 그 모습은 장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통해 특이하게 실현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작가 스스로의 말을 통해서도 나타나듯이 궁핍과 빈곤의 문제다. 우리의 경우 국민소득이 일만 달러에 이르렀고, 절대빈곤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일종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궁핍’과 ‘빈곤’은 오히려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작가에 의하면 “빈곤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그 경계는 모호해지고 개념은 다양해져서 사회가 진보하고 복잡해질수록 빈곤 또한 따라서 팽창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얼핏 쉽지 않은 이해를 요구하는 발언같지만, 쉽게 말해서 소위 상대적 박탈감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밥을 굶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게 풍성해지는 물질 혹은 첨단 명품의 양들은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신속하게 낙오시키고 있는가. 비록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입고 무능력해졌다고는 하지만, 돈이 없어 먹고 싶은 스키야키를 못먹는 전직 대학교수의 한심한 몰골은, 배수아의 건조한 문체 속에서 가련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이 장편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여러 인물들이 묘사되고 있고, 돈이 없어 낙담한 인물들의 나태한 낙백이 흐느적거리며 떠돈다. 기이한 것은, 그럼에도 그들은 불쌍하거나 처량한 감정만으로 처리되지 않고, 이같은 사회구조에 대한 비난과 고발 역시 이념적․제도적 차원에서 접근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곤한 그들은 많은 경우 그냥 어슬렁거리기 일쑤이며, 심지어는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수상쩍은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그것은 노동을 강요한다. 노용은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버리고 있는 정도의 음식물만 있으면, 그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지문이 보여주듯, 이 소설은 노동과 생계라는, 의심받아본 일이 없는 전래의 생활방식에 기본적인 불만을 나타낸다. 이 불만은 주인공들을 노동에서 의도적으로 소외시키고, 때론 그들을 비굴하게까지 내몬다. 일종의 소피스트케이트된 삶의 방식을 드러냄으로써 질주하는 현대사회의 속도와 기능을 근본적으로 붙잡아보는 것이다.

  담백한 이미지로서 소설을 통한 회화의 구현이라는 평가를 배수아에게 이미 행한 바 있는 나로서는 (「소설로 쓴 그림」, 98년 간행 『가짜의 진실, 그 환상』 수록) 배수아의 이러한 새 메시지가 신선하다. 그러나 지금 내게 우선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이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들의 흥미있는 모습들이다. 돈경숙, 음명애, 표현정, 부혜린, 배유은 등 그 성씨부터 심상치 않은 희성을 가진 그녀들은, 물론 작품의 큰 주제인 빈곤과의 갖가지 관련성 아래 얽혀 있지만, 그와 더불어 간과될 수 없는 새로운 여성상이랄까, 그런 음화와 함께 튀는 느낌이다.

  우선 돈경숙 : 그녀는 장애가 된 남편의 전처 돈을 뺏아 스키야키를 먹으러 가는 여성이다. 동물적인 파워로 가득찬 인물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은 “전처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돈경숙은 팔을 휘둘렀다. 그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괴력이 느껴졌다”는 표현에서도 잘 포착된다.

  음명애 : 그녀 역시 반성없는 삶을 독주하는 스타일로서 가히 막힘이 없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빵과 커피와 마가린과 호두를 넣은 쿠키는 음명애의 주식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점에서 제대로 된 그릇에 담긴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것을 음명애는 은근히 혐오했다. 패스트푸드나 간이식당, 마가린이나 버터 바른 빵, 설탕을 넣지 않은 무한대의 커피. 그리고 20세기 최대의 걸작품인 인스턴트 식품. 음명애는 이런 것을 좋아했다.

  남자를 독차지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더 이상의 남자는 그녀 인생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여성. 남성은 벌써 그녀에게서 제압된 존재다.

  표현정 : 요염하게 치켜올라간 눈, 음험한 분위기는 그녀는 오직 돈만 밝힌다. 남편을 경멸하는 의상 디자이너로서 돈 앞에서는 욕정도, 가족도 없다고 주장.

  배욱은 : 꿈같은 휴가-맛있고 기름진 단 음식을 먹고 신용카드 결제 걱정하지 않으며 무한정 쇼핑하고 파티에 나가는 생활을 꿈꾸는 그녀에겐 결혼한다고 법석인 사람들이 한심할 뿐이다.

  이 밖에도 다른 많은 여성들이 있는데 요컨대 그들에게는 남편이나 가정, 가족보다 돈이 소중하다. 이를 위해서 이들은 체면이나 예의같은 교양을 내동댕이치며, 심지어 사랑이나 욕정같은 전통적인 여성의 감정까지도 폐기해 버린다. 나로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바로 얼마전, 즉 90년대 문학 속의 여성들과 판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이 어떤 의미에서 절정기에 도달했던 시점이 아니었나 생각되는 90년대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 주제는 언제나 여성의 성적-정치적 욕망이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권력을 독점하여온 남성과의 대결이 있었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고, 그렇게 때문에 항상 객체로서의 자리에 머무르는 차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주조를 이루었다. 법과 제도에 이르는 갖가지 불평등도 이른바 남근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아래 90년대 페미니즘 문학은 뜨거웠다. 그 결과 여성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삼는 많은 작품들의 양산은 반드시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문학에서의 여성주의를 가져왔고, 때론 에로티시즘, 혹은 섹스문학의 범람과 연결되기도 했다.¹⁾

   그러나 배수아의 장편에서 이미 남성도, 남성과의 대결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 혹은 그것들은 벌써 사라졌다. 남성들은 능력있는 여성들 아래에서 밥을 얻어먹거나 돈을 타서 쓴다. 때로 심한 구박도 당하고 모욕도 당한다. 여성들의 관심이 이제 돈에 쏠리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 결핍과 빈곤 문제에 함몰되어 있는 까닭도, 이제 직접 돈을 벌고 관리하고, 더 많은 돈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된, 가장 절실한 현실감일 것이다. 여성들은 바야흐로 아무 도움없이 결핍과 빈곤, 즉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할 현장의 중심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돈 문제란 필경 생존의 문제인데, 문제는 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있다. 배수아의 주인공 표현정의 경우 그 상황은 이렇게 표현된다. “표현정은 돈을 좋아했다. 쓰기 위한 돈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로서의 돈이다. 표현정에게 돈이란 권력의 상징이었다”고. 말하자면 생존을 넘어 문화화(文化化)하고 있는데, 이때 문화란 악으로 침윤, 그 진입을 의미한다. 그것은 훨씬 교활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 2000년 이후에 등장한 여성작가들의 경우, 가령 정이현에게 있어서 그 모습은 매우 세련된 양상으로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교묘하게 그 사실을 드러내기도 하며, 은폐시키기도 한다. ‘돈’이라는 직접 표현 대신 ‘명문의대생’과 ‘자가용’으로 그 표현이 음험하게 문화화된 내용을 인용해보자.

ⅰ) 허벅지에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은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러나 사우는 서울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의대생인데다 잘생기기까지 했다.

ⅱ) 지방 캠퍼스에 다니는 데다 키스 하나 제대로 못하는 어리어리한 민석이를 몇 달째 만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애의 스포츠카 때문이었다. 차창을 열고 아파트 단지가 붕붕 울리도록 커다란 음악을 틀어놓은 채 나를 기다리는 은색 차!

  돈은 이미 확실한 위력과 연결되어있다. 물질적 부를 보장해 줄 뽄 아니라 신분을 상승시켜주고, 무엇보다 ‘폼’나게 해준다. 그러나 그 상승과 폼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 즉 자기과시일 뿐 상대방이나 타자에게 아무런 공감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객관성/사회성이 결여된 자가발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앞의 인용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정이현의 출세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그같은 풍속과 비판을 절묘하게 공작해내고 있는 역작인데, 그 안의 인관관계가 망가져있다는 사실은 이 소설 최대의 메시지이리라. 이 소설은 젊은 남녀의 데이트 현장을 삽화처럼 이것저것 연결시켜 주고 있는데, 막상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좀처럼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승과 폼을 얻고자 하는 여성과 섹스를 구하는 남성 사이의 어떤 코드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여자친구의 남자 파트너 1:2는 상우라는 명문의대생이다. 그는 섹스에도 테크닉이 있고 매너도 세련되었지만 결정적인 두 가지, 즉 차와 설득력이 없다. 여자를 감싸안을 수 없다. 남자 파트너 2:2는 민석이다. 그는 지방대생이지만 스포츠카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테크닉도 매너도 없다. 여자 친구 혜미: 남자애에게 밥 사주고, 같이 자주고 임신까지 했다. 소설 화자인 여성인 나로부터 당연히 한심한 동정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의 동정은 혜미의 외제차를 보는 순간 질시로 바뀐다. 남자 파트너 3: 그는 그냥 익명의 그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나올 뿐인데, 어쨌든 그녀의 종합분석에 의해 합격된 파트너이며, 그 또한 그녀를 소중하게 대한다. 둘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성행위로 돌입하는데, 이 순간 그녀의 심정은 비장하게 경정된다. 치밀한 계산서의 작성이다.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순간, 절체절명의 기로! 그 앞에 서서 나는 하늘과 땅을 걸고 성패를 겨루는 길을 택했다. 진정한 승부사는 건곤일척한다는 경구를 가슴에 돋을새김하면서.

  그러나 아뿔사! 그녀의 모든 계산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는 맺어지지 않는다. 속옷 선택에 신중하고, 은은한 화장을 하고, 적당한 시점에 타월을 깔고, 심지어는 빨리 엉덩이를 들지 않는 등 성공적인 첫 행위를 위한 세심한 배려와 그 실행에도 불구하고 둘은 성교 후 오히려 헤어진다. 처녀면 나와야 할 피가 나오지 않았고, 상대방 남성은 그 현장을 부드럽게 받아들였지만, 둘은 부드럽게 멀어져간다. 그토록 그 부분만은 영악하도록 지켜온 처녀였건만 왜 피가 나지 않았을까, 이런 궁금증은 무효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가 그녀에게 명품 백을 선물했다는 점이며, 그녀 역시 그것이 진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점이다. 그것이 진품이라면, 한번의 성교쯤 두 사람 모두의 손익에 적당히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간관계는 그 성교와 그 명품을 통해 다시 한번 왜곡과 파손을 확인할 뿐이다.

  배수아와 정이현의 페미니즘이 당연히 사회를 향한 사회학적 접근이라면, 2000년에 등장한 소설가 천운영은 여성성 내부를 향한 심리학적 추적을 함으로써 독자적인 경지 개척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최근의 두 단편 「명랑」과 「멍게 뒷맛」은 이런 차원에서 유니크한 세계의 전개라고 할 만하다. 할머니의 유골 가루를,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혓바닥으로 조금씩 맛본다는 엽기를 내용으로 삼은 「명랑」은 표면상 할머니, 어머니, 손녀로 이루어진 여자 삼대의 고단한 삶의 한 단상이다. 남자없이 작은 식당을 하고 있는 그들의 생활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과 수용은 제각각이다. 먼저 어머니는 생활현장의 집행자로서 반응이나 수용은 그 시간이 가장 짧을 수 밖에 없는, 현실 그 자체에 가깝게 밀착된 존재다. 반면 할머니와 소설 화자인 손녀는 다소간의 거리를 그로부터 갖고 있어서 이른바 비판적․반성적 시선의 소유자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화자인 손녀에게는 할머니가 그 모델이 되며 (둘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현실수용의 매개가 된다. 그렇지 않은 한, 손녀는 현실을 따르거나 거부하는 매우 원초적인 몸짓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녀에 의해 각인된 할머니는 어쩌면 대를 물려가며 전승되는 여성성의 짙은 혈맥이 아닐까. 소설 끝부분의 암시는 암시 이상의 의미이리라.

내 내부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그녀가 있다. 그녀는 내 속에서 숨쉬고 내 속에서 잠을 잔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명랑을 먹는다. 설탕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명랑가루에서는 그녀 냄새가 난다.

  작은 식당 곁방에서 아들을 잃고 가난한, 무료한 삶을 사는 노파. 그러나 손녀는 노파의 작은 버선발과 단아한 쪽진 머리와 함께 명랑이라는 진통제를 기억한다. 설탕가루처럼 시도 때도 없이 털어먹으며 삶의 온갖 신산을 인내하며 살아온 할머니. 마침내 장마 비에 의해 압사한 할머니. 그녀의 뼛가루를 조금씩 맛보는 손녀는 이미 이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노하우를 깨우친 것일까. 천운영의 이같은 깊이 있는 여성성은 「멍게 뒷맛」에서는 훨씬 잔혹하게 변주된다. 이 소설에서도 복수의 여성들이 나오는데 한 명은 소설 화자이고, 다른 한명은 그녀에 의해 묘사되는 옆집 여성이다. 소설은 화자에 의해 옆집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지, 그럼에도 의처증 남편과 얼마나 자주 험악한 싸움을 하는지 세세히 묘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화자이다. 옆집 여성이 부부싸움을 해야, 그 결과 큰 피해를 입어야 정서적 만족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여성 - ‘나’. 그 ‘나’는 결국 부부싸움 끝에 자신의 집으로 긴급피난해 온 옆집 여자에게 문열어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녀를 자살로 몰고간다. 한 여성을 죽음으로 이끈 직접 계기의 제공자가 된 또 한 여성. 비극의 원인은 물론 질시이다. 「명랑」에서의 인종이 미덕이었다면, 「멍게 뒷맛」에서의 질시는 악덕일 터인데, 페미니즘의 시퍼런 기세 앞에서 전가(傳家)의 장롱을 뒤지는 천운영의 속셈은?

  페미니즘의 참다운 목적과 가치가 남성이 제거되거나 무력하게 된 상황에서 여성만이 개가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는 이제 새로워져야 할 때이다. 그 이해의 단초를 나는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 혹은 귄터 그라스의 『넙치』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떨 제의하고 싶다. 두 소설은 타락한 세상의 주요한 원인을 남성적 폭력에서 찾고, 그 대안으로서 여성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되는데, 특히 바하만은 그 자신 여성이었고, 가장 치열한 여성주의자였다는 사실에서 음미될 만한 많은 요소들이 있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 - 77년에 발표되었지만 바하만은 이미 작고한지 오래 되고, 또 『넙치』에 대한 논의가 계속 활발함으로 - 『넙치』를 보면, 인류학사를 남녀대립사로 대비한 작가의 구도가 흥미있게 펼쳐진다. 그 도식 자체에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열한 명의 여자요리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역사는, 그 역사가 사실은 얼마나 여성들의 힘에 의해 지켜져 왔는지, 그리고 그 에너지가 어떻게 재평가되어야 하는지, 미래의 역사와 여성성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그려낸다. 소설의 첫 부분은 식량과 요리를 통한 여성들의 헌신이 전쟁과 기아만을 가져오기 일쑤인 남성들의 광포를 그나마 이겨내게 한, 기록되지 않은 힘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선사시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어머니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파악하고, 부성(父性)은 뒤에 편입되었다는 일종의 원시모계제를 주장한다. 남성 중심의 프로메테우스 신화 대신 여성 중심의 아우아 신화를 내놓는 것도 특이하다. 이같은 인식 아래에서 전개된 소설 『넙치』에서 남성 주인공 화자는 분명히 선언한다.

   나는 정말 여성해방 운동가들 편이다.

  그러나 이 여성해방 운동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이채롭다. ‘나’는 이 운동에 찬성하면서도 극단적인 것은 반대하는데, 그 이유를 아우아의 유방이 세 개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은 일종의 과잉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인 ‘나’는 여성해방운동을 지지하면서도, 그 과열된 양상에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작가의 여성관은 모순으로 투영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한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래는 여성이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라스를 생각할 때, 여성의 사랑과 이성을 기대하는 것은 곧 인류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에 그 소망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여성 해방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지만, 그라스처럼 그 래디칼한 운동성에는 찬성을 유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배수아의 주인공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정이현의 또 다른 주인공들, 즉 남성들이 반성하고 고려해야할 많은 부분들도 함께 남아 있다. 한가지만 들어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한 대목.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병기처럼 사장을 들이댄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운영의 두 단편이 보여주는 여성성의 저 칙칙한 (미덕이든, 혹은 악덕이든) 집요성이다. 남성성에도 잠복해 있기 마련인 이러한 단면이 새로운 세기, 새로운 여성적가에 의해 새삼 여성성의 본질적 측면으로 제기된 까닭은, 페미니즘의 일방성에 대한 반란일까. 페미니즘은 이제 껴안아야 할 많은 요소들로 그 몸이 부푸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