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현길언_소설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1940년생. 소설 『용마의 꿈』 『껍질과 속살』 『한라산』 『보이지 않는 얼굴』 등.
연구실과 집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면서야 글을 쓰고 가르치면서 생업을 유지해 온 자신의 모습을 조금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래서 약간은 부끄럽고, 더 이상 그 부끄러움을 덜기 위한 생각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남기고(언제까지 남겨질지 모르지만) 남에게 주어버리고, 혹 버려지는 책을 구분하면서, 글이 왜 필요한가 하는 아주 옛날에 생각했던 그 별 쓸모없는 생각들을 다시 되풀이하게 되었고, 엉성한 글에 퍼부었던 설익은 객기가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리하고 나니 버리지 못한 책들의 대부분은 작품집과 자료집이었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집에서는 어른들로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격려의 말을 자주 들으면서 자라왔다. 지금에도 그러한 격려의 덕담은 여전할 것이다. 더욱 가슴을 휘어잡은 잠언은(?) ‘소년이여 대망을 품으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아마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대망을 품고 ‘공부했던 사람들의 역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주체는 잘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식의 폭발시대에, 과학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시대에, 공부를 잘하고 많이 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지도 않으며, 과학의 발달과 높은 지식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점점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하다. 어쩌면 과학 문명과 지식으로 넓어진 욕망의 통로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인간의 이해에 대한 논의를 현학적으로 말했지만, 그것은 정말 내 이웃과 자신을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 생각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그럴수록 긴장되고 그래서 세상은 각박해지고 있지 않은지?
세상의 삭막해짐은 결국 많이 알고 많이 누리는 사람들의 사람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지배의 논리에 갇혀 있는 한 더욱 심화될 것이며, 그래서 인간과의 아름다운 관계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안다는 것이 소유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라면 결국 관계는 파탄되고 말 것이 아닌가.
한 편의 소설은 과학이나 학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내 작은 서재에도 소설책은 오래 남을 것이다. 또 그것들은 어느 때에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으면서 사람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경이라는 책의 비밀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추악하고 모자란 그 모습을 그대로 숨김없이 정말 발가벗겨 놓았다는 데서 조금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나는 그 책에서 문학의 향기라는 연약함이 곧 힘이 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향기와 힘을 동시에 간직할 수 있는 소설을 새삼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참 모습을 자유롭게 보여주는 작품일 것이다.
그러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려면? 자기의 불완전함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폭력과 죽음으로부터 태연할 수 있고…… 숨이 막히지만, 그것을 결국 작은 자유로움에서 시작할 수 있음을 믿을 때에 숨통이 조금은 트인다.
최근 들어 우리 문학을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한다. 번역 사업을 지원하고, 외국에 나가 한국문학 행사를 하고, 외국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모셔다가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일도 필요한데 그보다 시급한 것은 풍토를 바꾸는 일이다. 문학이 정치적이 되고, 문학 영웅주의자들이 판치는 한에는 세계화가 어렵다. 왜냐면 그것은 모든 문학 향유자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주의와 영웅주의는 문학의 풍토를 흐리고 있고,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경박함부터 배우게 하고 있으니, 더욱 큰일이다. 문학이 상업주의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대세가 거기에 묻혀졌으니 안타깝다.
요즈음에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진실한 사람들을 만나면 목이 매인다. 나이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나 그것이 귀해서인가. 좁은 서재의 책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덧없는 생각해 해본다. 설사 살아가는데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느 순박한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들어도들어도 부담이 없을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 모두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스스로 기다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