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에선 내 데뷔작이 장막희극 「토끼와 포수」로 통설되어 있고 스스로도 그렇게 대답하곤 했지만, 내심에서는 그 보다 1년 전에 쓴 단막 풍자극 「관광지대」가 걸리곤 했다. 작년에 민족문학대계에 수록될 내 작품으로는 「오장군의 발톱」과 함께 「관광지대」가 선정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관광지대」는 1963년 말 무렵에 쓴 소위 처녀 습작이다. 실은 그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희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왜 희곡을 쓰게 되었는가. 그 사연부터 적고 싶다.
중학교 문학교원을 하다 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육군에 현지(現地)입대한 나는 63년 2월 말에 예편하기까지 사병과 부관장교로 복무했다. 제대하자마자 드라마센타 연극아카데미(현 서울예술대학 전신) 연구과정에 입학했는데, 연극에 각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오랜 군대 생활로 인한 교양의 결락 부분을 무엇으로든 충전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이남의 배운 젊은 예술가 지망생’(수강자격이 대학 졸업이었다)들과의 자연스러운 접촉을 통해서‘이남의 민간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동기였다. 하지만 막상 입학해서는 중학생 때부터의 꿈이었던 소설 구상에 골몰했는데다가 도무지 비사교적인 만학(晩學)의 주제 꼴임으로써 입학 목적을 스스로 무력화시켰다.
다른 극작 전공 수강생들은 모두 두세 편씩 습작희곡을 제출했는데도 줄곧 벙어리로 앉아서 두 학기를 보내고 나니 남들이 모두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서, 이제는 자퇴하던지 희곡도 써 보던지 양자택일을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운명(?) 탓인지 홀연히 소극(笑劇)감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이 「관광지대」이다. ‘판문점 명도소송’이라는 부제를 단 이 소극은 그러나 당시의 극악했던 정치상황으로 해서 뜻밖의 화를 당해야 했다.
그 경위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복사한 원고 1부를 먼저 중학동창인 이철범씨(시인 겸 평론가)에게 읽어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가 연극아카데미에 무시험 입학할 수 있도록 유치진 선생의 최측근인 오사량 선생(배우 겸 연출가, 전 서울예술대학 교수)에게 부탁한 은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철범씨가 그것을 대학 후배인 연출가 이효영 씨(당시 중동고 영어교사)에게도 읽어 보라고 권한 게 화근이 되었다. 이효영 씨는 마침 그때 연습 중이던 전국 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 참가작품(L씨에게 청탁해서 얻은 희곡이었다)을 중단하고 나에겐 무단으로 「관광지대」로 대체해 버렸다. 연극 제목도 부제인 「판문점 명도소송」으로 바꾸고.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한달 간이나 연습 중이었다. 중단시키면 이효영 씨는 학교를 그만 둬야 할 형편이었다. 결국 중동고등학교는 그 해의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나는 놀랍게도 종로서 정보과 형사로부터 면회 요청을 받게 되었다. 만나 보니 국시(國是)를 위반하고 UN군측 미군 대표를 냉소한 ‘사상적 악질’(형사의 표현)이라지 않는가. 알고 보니 검찰청 공안부에서 내 신분과 배후관계를 내사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첫 필화는 보안사 문관이던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나긴 했지만 나는 비로소 '통일 문제'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다간 지뢰 지대의 인계철선을 건드리듯 큰 코 다친다는 걸 배웠다.
「관광지대」는 그 후의 내 인생 행로를 결정시켰다는 점에서 내겐 어느 자작(自作) 희곡보다도 귀중한 의미를 지니는, 나를 향한 데뷔작이다. 「관광지대」를 쓰는 동안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자질을 자각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해 말경 나는 제 2습작 「토끼와 포수」를 탈고했고 이듬 해 (1965년) 민중극장에 의해 명동국립극장에서 초연(김정옥 연출, 당시 중앙대 교수, 전 문예진흥원장)되었다. 이 원고와 함께 보내는 사진은 그때의 한 장면이다. 좌로부터 추송웅, 양광남, 나옥주, 박근형, 최지숙, 김혜자이다. 그 초연은 전혀 무명인 작가의 작품임에도 당시로서는 유일한 연극상이었던 동아연극상의 대상, 연기상, 희곡상을 휩쓸면서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만큼 화제가 되었고, 덕분에 나는 일약 기성작가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이례적일 정도로 화려했던 나의 데뷔는 저 사진 속 뛰어난 재능들과의 만남 덕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