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나의데뷔작
나는 1997년 《문예중앙》 겨울호로 등단했다. 86학번이니 대학에 입학한 지 11년만이고,중3 때부터 시를 썼으니 처음 시를 쓴 지 15년 만이었다. 천재 타입은 확실히 아니었던 셈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백일장에 나가거나 남에게 시를 보여준 기억이 없다. 내 일기를 훔쳐 읽는 게 취미였던 형이 가끔 자기 연애편지에 써먹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집을 읽고 합평회에 참여한 것은 대학에 들어와서다. 촌티가 좔좔 흐르는 시였는데, 호되게 비판하기로 유명한 선배들이 의외로 칭찬을 섞어 주었다. ‘시가 가능성이 보여서’라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쟤는 약해서 비판을 견딜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처음 시를 투고한 것은 1989년 겨울이었다. 군 복무를 위해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상태였는데, 애인과도 이별을 한 참이라 마음이 꽤나 심란했다. 대학생활을 정리하는 기념으로(한 학기 동안 복학생이 될 터였지만, 알지 않는가? 청춘은 예비군복에는 깃들지 않는다는 거) 내게 등단이라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열심히 써서 12월 초에 신문사에 투고했다. 크리스마스 무렵, “권혁웅 씨죠?” 묻는 중년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싸. “영장 나왔습니다. 1월 8일입니다.”
군대에 다녀와서도 시 쓰기는 지지부진했다. 1993년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생활고(같은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와 여전히 내무반 같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밖으로만 돌았다. 그런데 그 덕분에 세상을 유랑하는 자의 마음을 갖게 된 것도 같다. 그렇거나 말거나, 1994년부터 다시 신문사 투고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신춘문예에 대한 환상이 제법 남아 있어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신문사만 고집했다. 최종심에 한 번 오르고, 이듬해에는 두 군데 투고해서 두 번 오르고, 그 이듬해에는 세 군데 투고해서 세 번 올랐다. 약도 따라서 올랐다.
중간에 시험 삼아 쓴 비평이 덜컥 되는 바람에 먼저 비평가가 되었다. 아직도 내 약력에 따라붙는 ‘시인이자 문학비평가’ 운운은 이때의 ‘덜컥’이 만들어낸 운명이다.
그러던 중 《문예중앙》에서 연락이 왔다. 유종호, 김명인 선생께서 심사를 맡았는데, 각자 의논하려고 골라 오신 작품 중에서 겹치는 게 내 시였다고 전해 들었다. 어느 한 분이 주장하고 다른 분이 반대한 게 아니니, 시가 괜찮다는 증거 아닌가 하고 으쓱할 사안이 아니다. 처음 고를 때는 마음에 드는 것과 무난한 것을 섞어 고르기 때문이다. 내 시가 다른 응모작들보다 ‘더 무난’했던 셈이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서 등단작들의 한계가 점점 더 뚜렷이 보였다. 지금 봐도 그 시들은 대체로 무난하다.
특별히 결점을 지적할 게 없다는 사실, 그게 최대의 결점이다. 등단시 11편(10편을 싣기로 되어 있었는데, 착오로 11편이 실렸다) 가운데 시집에 수록한 시가 겨우 두 편이다. 나머지는 다 버렸다.
가끔 작품집이나 전집에 실리지 않은 작고 시인의 시나 산문을 발굴했다는 기사가 뜬다. 시인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작품도 있겠지만, 더 자주는 책에 실을 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버린 글도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내 경우만 해도 그동안 발표한 시가 500편이 넘는데, 시집에 실은 시는 300편이 채 못 된다. 누가 볼까 두려운 작품들을 나는 무슨 용기로 발표했을까? 하긴, 하룻강아지가 무슨 두려움을 알랴. 두려움이 없으니 따로 마련해야 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식민지시대를 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전집을 수습할 만큼 큰 시인이 못 된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때 버리지 않고 수습해둔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가 「서울시 신림동 산77 성 김복례의 하루」라는 작품이다. 선배가 살던 신림동 산동네를 다녀온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인데, 실은 나 역시 오랜 세월을 산동네에서 살았기에 익숙한 체험이었다(나중에 이 얘기들이 모여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이 된다). 그동안의 내 시는 이 체험을 회상하고, 그걸 바탕으로 몸과 사람과 세상을 읽고, 이 체험의 현재성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세속에서 시작해서 세속으로 돌아오기. 세속 안에서 세속을 초월함으로써 세속에 들어앉기.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찾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기(구원은 구원 따위를 바라지 않을 때 이미 임재해 있으니까). 이런 내 시의 내력이 이 시에 예언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시에서 김복례 할머니는 1909년 생으로 나온다. 지금이 2015년이니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을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면, 지금도 수많은 김복례 할머니가 주변에 산다. 그 분이 떠나간 자리에 김복례 할머니가 또 도착하신다. 그 불멸성에 ‘세인트’라는 이름을 붙여 드렸다. 이미 당신의 이름 안에서도 할머니는 복자(福者)다. 그러니 그분의 이야기가 복음이고.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내가 그자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쓰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 물론 그때 가서 또 여러 편의 발표시들을 지우며 후회하고 있을 테지만.
김복례 할머니와 불멸
글 권혁웅 ㅣ 시인, 평론가. 1967년생
시집 『소문들』 『마징가 계보학』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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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를 투고한 것은 1989년 겨울이었다. 군 복무를 위해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상태였는데, 애인과도 이별을 한 참이라 마음이 꽤나 심란했다. 대학생활을 정리하는 기념으로(한 학기 동안 복학생이 될 터였지만, 알지 않는가? 청춘은 예비군복에는 깃들지 않는다는 거) 내게 등단이라는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열심히 써서 12월 초에 신문사에 투고했다. 크리스마스 무렵, “권혁웅 씨죠?” 묻는 중년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싸. “영장 나왔습니다. 1월 8일입니다.”
군대에 다녀와서도 시 쓰기는 지지부진했다. 1993년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생활고(같은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와 여전히 내무반 같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밖으로만 돌았다. 그런데 그 덕분에 세상을 유랑하는 자의 마음을 갖게 된 것도 같다. 그렇거나 말거나, 1994년부터 다시 신문사 투고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신춘문예에 대한 환상이 제법 남아 있어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신문사만 고집했다. 최종심에 한 번 오르고, 이듬해에는 두 군데 투고해서 두 번 오르고, 그 이듬해에는 세 군데 투고해서 세 번 올랐다. 약도 따라서 올랐다.
중간에 시험 삼아 쓴 비평이 덜컥 되는 바람에 먼저 비평가가 되었다. 아직도 내 약력에 따라붙는 ‘시인이자 문학비평가’ 운운은 이때의 ‘덜컥’이 만들어낸 운명이다.
그러던 중 《문예중앙》에서 연락이 왔다. 유종호, 김명인 선생께서 심사를 맡았는데, 각자 의논하려고 골라 오신 작품 중에서 겹치는 게 내 시였다고 전해 들었다. 어느 한 분이 주장하고 다른 분이 반대한 게 아니니, 시가 괜찮다는 증거 아닌가 하고 으쓱할 사안이 아니다. 처음 고를 때는 마음에 드는 것과 무난한 것을 섞어 고르기 때문이다. 내 시가 다른 응모작들보다 ‘더 무난’했던 셈이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서 등단작들의 한계가 점점 더 뚜렷이 보였다. 지금 봐도 그 시들은 대체로 무난하다.
특별히 결점을 지적할 게 없다는 사실, 그게 최대의 결점이다. 등단시 11편(10편을 싣기로 되어 있었는데, 착오로 11편이 실렸다) 가운데 시집에 수록한 시가 겨우 두 편이다. 나머지는 다 버렸다.
가끔 작품집이나 전집에 실리지 않은 작고 시인의 시나 산문을 발굴했다는 기사가 뜬다. 시인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작품도 있겠지만, 더 자주는 책에 실을 만한 수준이 못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버린 글도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내 경우만 해도 그동안 발표한 시가 500편이 넘는데, 시집에 실은 시는 300편이 채 못 된다. 누가 볼까 두려운 작품들을 나는 무슨 용기로 발표했을까? 하긴, 하룻강아지가 무슨 두려움을 알랴. 두려움이 없으니 따로 마련해야 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식민지시대를 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전집을 수습할 만큼 큰 시인이 못 된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때 버리지 않고 수습해둔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가 「서울시 신림동 산77 성 김복례의 하루」라는 작품이다. 선배가 살던 신림동 산동네를 다녀온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인데, 실은 나 역시 오랜 세월을 산동네에서 살았기에 익숙한 체험이었다(나중에 이 얘기들이 모여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이 된다). 그동안의 내 시는 이 체험을 회상하고, 그걸 바탕으로 몸과 사람과 세상을 읽고, 이 체험의 현재성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세속에서 시작해서 세속으로 돌아오기. 세속 안에서 세속을 초월함으로써 세속에 들어앉기.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찾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기(구원은 구원 따위를 바라지 않을 때 이미 임재해 있으니까). 이런 내 시의 내력이 이 시에 예언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 시에서 김복례 할머니는 1909년 생으로 나온다. 지금이 2015년이니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을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면, 지금도 수많은 김복례 할머니가 주변에 산다. 그 분이 떠나간 자리에 김복례 할머니가 또 도착하신다. 그 불멸성에 ‘세인트’라는 이름을 붙여 드렸다. 이미 당신의 이름 안에서도 할머니는 복자(福者)다. 그러니 그분의 이야기가 복음이고.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내가 그자리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쓰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 물론 그때 가서 또 여러 편의 발표시들을 지우며 후회하고 있을 테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