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단편소설
4월 초에 마침 그녀의 이메일로 가끔 여행 안내 메일을 보내주는 한 여행 동호회 카페로부터 메일이 왔다.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다고 소문나서 예전에 가입만 해놨던 카페였다. 7월 초에 12박 13일의 발칸 9개국 여행의 모집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13일간 발칸 반도의 아홉 나라를 도는패키지 상품이 예상보다 저렴했다. 그녀가 그 상품을 택한 것은 그곳만 여행하면 북구를 제외하고 유럽은 전부 마스터한다는 점. 무엇보다 여행 일정이 빡빡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편의 몫까지 여행 경비를 지불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도 나이가 드니 힘들고 포터와 포토그래퍼의 수고비로도 그 정도는 지불해야 할 거다. 게다가 멤버십이 돈독해진다면야. 성공적인 여행이 된다면, 나이 들면서 그와 함께 못 가 본 곳을 여행하리라. 그녀는 아직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나 중남미 대륙을 떠올렸다.
여행을 다녀오고 2주가 넘었을 때 그가 그녀의 USB에 여행 사진을 옮겨 주었다.
7월의 발칸반도는 이상고온으로 40도를 기록했다. 거의 매일 국경을 넘어가야 했다. 관광버스를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탄 적도 있었다. 가이드가 ‘5.6.7.8.9 작전’이라 부른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5시 모닝콜, 6시 조식, 7시 출발, 8시 석식, 9시 호텔 입실. 매일 짐을 풀고 싸고 겨우 4시간정도 눈을 붙였다.
그렇게 매일 달리니 눈앞의 관광지와 유적을 봐도 멍했다. 도무지 실감이 없고 감동이 되지 않았다. 기껏 하루에 한 두 곳 관광지만 보는데, 잠시 사진 찍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폭염속에서 지친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커다란 렌즈를 장착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한 컷이라도 더 찍으려고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마치 그녀가 모델이라도 되는 듯 성가시게 찍었다. 그래서 그녀가 손사래를 치는 모습도 많이 찍혔다. 하지만 그의 Canon 5D Mark DSLR 카메라로 찍은 발칸 반도는 사진 속에서 더 선명하게 빛났다. 사진 속에서 그녀도 빛나보였다. 카메라의 마술일까. 5천 컷의 사진 속에서 그녀의 독사진은 천 컷에 육박했다. 그들 부부가 다정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도 이백 장이 넘었다. 하지만 사진이 재현해낸 촘촘한 시간의 기록은 모래처럼 그녀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것이다. 결국 그녀가 움켜쥘 수 있는건 무얼까. 그녀는 미래의 기억, 혹은 기억의 미래를 생각하고 슬픔에 젖었다.
슬라이드 쇼로 설정된 사진 이미지가 흐르고 있다. 나라별 도시별로 정리되지 않은 사진들은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유적과 풍경 때문인지 헷갈린다. 31명이 함께 한 단체관광여행이라 사진 속에 일행 중의 한 두 명이 간혹 잡티처럼 끼어있다. 일행들로부터 셀카의 여왕으로 추대된 ‘집시여인’이 셀카봉을 쭉 뽑아들고 촬영삼매경에 빠진 모습. 고압적인 자세가 한결같은 카페지기 ‘몽
블랑’, 배불뚝이 ‘소쩍새’, 여자 밝히는 ‘단백질’…… 주어진 시간에 경쟁적으로 관광지의 포토 존에서 촬영해야하니 그럴 수밖에.
여행의 예약과 결재는 카페지기를 통해서 해야 했다. 싱글들을 위한 카페였으므로 여행 그룹에 부부가 들어가서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여행을 가는 건 싱글이 아니어도 된다고 카페지기는 말했다. 출발 당일 밤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의 모임장소로 갔을 때 덩치 좋은 60대 초반의 남자가 “윤슬님?”하고 그녀를 불렀다. 초면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매서운작은 눈과 거만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그가 보통은 아닌 사내라고 느꼈다. 그의 앞에서 주의사항을 듣는 카페 회원들은 모두 굳은 얼굴들이었다. 예상과 달리 40대 이상 50대가 대부분이었다. 더러 60대도 있는듯했다. 싱글들이라 해서 20,30대의 처녀들을 기대했던 남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카페지기 ‘몽블랑’이 일장 연설을 끝내자 교주처럼 명령했다.
“모두 일렬횡대로 서세요! 여기 모르는 분들도 있으니 한 사람씩 옮기면서 서로 자기 닉을 소개 하세요.”
그녀와 남편은 그들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윤슬입니다.”
그녀가 닉을 소개하며 인사하고 그가 덧붙였다.
“안녕하세요. 윤슬님 동행입니다.”
카페에 가입하지 않은 그는 눈치가 보였는지 남편이라 하지 않고 동행이라 소개했다. 몽블랑은 다시 소리쳤다.
“모두 원을 그리고 서서 옆 사람의 손을 잡으세요!”
그녀는 옆에 선 땅딸막한 배불뚝이 남자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자아, 다 잡으셨죠?” 몽블랑이 다시 확인했다. 할 수 없이 옆 남자의 축축한 손을 잡았다. 그녀와 남편은 모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손을 앞뒤로 흔들며 그들의 강령 같은 것을 복창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는 교양인이다”, “우리는 예절 바르다”,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인이다” 등등.
“아, 여기 물이 왜 이러냐.”
남편이 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 또한 함께 한 일행들의 면면을 보고 기운이 빠졌다.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 아닌가. 살뜰한 아내로부터 관리 받지 못한 티가 나는 배 나오고 제멋대로인 나이든 독신 남자들. 남자들보다 더 많은 여자들. 성형과 시술로 나이를 감추고 있지만 그로 인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부류와, 여자로서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듯이 염색도 안하고 화장기도 없는 부스스한 몰골의 여자들로 나뉘었다. 그나마 여행사측에서 모객된 9명이 합류할 것이며, 두 커플이 포함돼있다는 말에 내심 기대를 걸었다.
사진을 보니 어디서나 셀카봉을 쭉 내밀며 “스마일! 김치! 찰칵!”하며 포즈를 취하던 ‘집시여인'의 모습이 꽤 많이 들어있다. 머리를 와인색으로 염색하고 피부에 무슨 시술을 했는지 주름이 하나도 없이 통통한 입술의 여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나중에 그녀가 고백하기로는 환갑이라고 했다). 소녀풍의 옷을 입고 있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기분이 묘했다. 목소리를 성형할 순 없나보다. 그래도 화합이 될 듯 안 되는,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카페의 분위기에 감초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중국의 배불뚝이 중 포대화상을 닮은 소쩍새. 늘 허허 웃음을 달고 있지만 천방지축인 중늙은이. 그는 식수로 사용하는 어느 마을의 샘물에 맨발로 들어가 반바지까지 적시며 첨벙대고 놀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남편의 사진 속에서 그는 반바지가 젖은 채 브이 자를 그리며 웃고 있다.
‘단백질’은 40대 초중반의 사내로 키가 작은 근육질의 남자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슬라브족 미녀만 보이면 전라도 억양의 짧은 영어로 함께 사진 찍기를 종용했다. “포토 투게더 잉?” 대부분의 여자들은 웃으며 함께 찍는다. 사진을 함께 찍을 때 그의 손은 서슴없이 튜브탑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벗은 어깨나 허리에 걸쳐 있어서 보는 그녀가 다 불안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무례한 도촬도 서슴지 않았다. 남편이 도촬하는 그의 모습을 다시 도촬한 사진도 있다. 우연히 그의 뒤에 있다가 탱크탑을 입은 구릿빛 미녀의 가슴께를 스마트폰으로 줌인해서 찍는 걸 그녀도 본 적이 있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관광을 마치고 배를 타고 근처 로쿠룸 섬의 누드비치를 지날 때였다. 갯바위에 누워 선탠을 하거나 돌아다니는 벌거숭이들이 언뜻 군집 원숭이들처럼 보였다. 일행들은 누드 남녀들을 찍으려고 모두 뱃전으로 몰려 난리 법석을 떨었다. 찍은 사진들을 서로 비교해 보며 노골적으로 품평을 하는 나이든 남녀들의 모습이야말로 옷을 입은 원숭이들처럼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꺼내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지만.
여자들은 여자 친구와 함께 온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게 역력했다. 며칠 지나자 남자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젊은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중적으로 관심을 받는 1번 여자와 2번 여자가 누군지가 드러났으며, 남자들 사이의 모종의 긴장감도 전해져 왔다. <짝>이라는 없어진 TV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나이 든 여자들 중에도 몇몇은 그런 의도를 숨기진 못하는 거 같았다. 딱 봐도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온몸이 준비 완료 단계에 있는 여자들. 얼굴을 무기로 쓰기 위해 리모델링하거나 유방 확대술을 단행한 여자들을 그녀는 유심히 보았다. 나이 들어서도 짝짓기를 위해 전력투구하다니. 혼자 산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25년 지기 친구, 아니 연애 기간까지 30년 지기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우정이나 육친애에 가까운 감정은 불필요한 감정과 에너지 낭비를 막아준다.(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
글 권지예 ㅣ 소설가, 1960년생
소설 『유혹 전 5권』 『4월의 물고기』 『붉은 비단보』 『아름다운 지옥1, 2』 『퍼즐』 『꽃게무덤』 『폭소』 『꿈꾸는 마리오네뜨』, 그림소설집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서른일곱에 별이 된 남자』, 산문집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 『해피홀릭』 등
그들이 함께 여행한 것은 15년 만이었다. 인생 자체가 여행이라 한다면 사실 그들이 함께 한 여행은 25년이나 되었다. 새삼스레 여행을 함께 갈 생각을 한 건 은혼식이라 칭하는 결혼 25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시간 때문이었을까. 살아보니 긴 인생에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은 여행밖에 더 있을까. 사실 3월에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맞을 때까지도, 그녀는 여행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딸애가 가을에 결혼을 앞두고 있고, 아들은 입영 날짜를 받아둔 시점이었다. 곧 가족 구성원이 두 사람만 남는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녀는 낯설고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 여행은 MT 같은 건지 모른다.
|
4월 초에 마침 그녀의 이메일로 가끔 여행 안내 메일을 보내주는 한 여행 동호회 카페로부터 메일이 왔다.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다고 소문나서 예전에 가입만 해놨던 카페였다. 7월 초에 12박 13일의 발칸 9개국 여행의 모집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13일간 발칸 반도의 아홉 나라를 도는패키지 상품이 예상보다 저렴했다. 그녀가 그 상품을 택한 것은 그곳만 여행하면 북구를 제외하고 유럽은 전부 마스터한다는 점. 무엇보다 여행 일정이 빡빡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편의 몫까지 여행 경비를 지불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도 나이가 드니 힘들고 포터와 포토그래퍼의 수고비로도 그 정도는 지불해야 할 거다. 게다가 멤버십이 돈독해진다면야. 성공적인 여행이 된다면, 나이 들면서 그와 함께 못 가 본 곳을 여행하리라. 그녀는 아직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나 중남미 대륙을 떠올렸다.
여행을 다녀오고 2주가 넘었을 때 그가 그녀의 USB에 여행 사진을 옮겨 주었다.
7월의 발칸반도는 이상고온으로 40도를 기록했다. 거의 매일 국경을 넘어가야 했다. 관광버스를 하루에 10시간을 넘게 탄 적도 있었다. 가이드가 ‘5.6.7.8.9 작전’이라 부른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5시 모닝콜, 6시 조식, 7시 출발, 8시 석식, 9시 호텔 입실. 매일 짐을 풀고 싸고 겨우 4시간정도 눈을 붙였다.
그렇게 매일 달리니 눈앞의 관광지와 유적을 봐도 멍했다. 도무지 실감이 없고 감동이 되지 않았다. 기껏 하루에 한 두 곳 관광지만 보는데, 잠시 사진 찍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폭염속에서 지친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커다란 렌즈를 장착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한 컷이라도 더 찍으려고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마치 그녀가 모델이라도 되는 듯 성가시게 찍었다. 그래서 그녀가 손사래를 치는 모습도 많이 찍혔다. 하지만 그의 Canon 5D Mark DSLR 카메라로 찍은 발칸 반도는 사진 속에서 더 선명하게 빛났다. 사진 속에서 그녀도 빛나보였다. 카메라의 마술일까. 5천 컷의 사진 속에서 그녀의 독사진은 천 컷에 육박했다. 그들 부부가 다정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도 이백 장이 넘었다. 하지만 사진이 재현해낸 촘촘한 시간의 기록은 모래처럼 그녀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것이다. 결국 그녀가 움켜쥘 수 있는건 무얼까. 그녀는 미래의 기억, 혹은 기억의 미래를 생각하고 슬픔에 젖었다.
슬라이드 쇼로 설정된 사진 이미지가 흐르고 있다. 나라별 도시별로 정리되지 않은 사진들은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유적과 풍경 때문인지 헷갈린다. 31명이 함께 한 단체관광여행이라 사진 속에 일행 중의 한 두 명이 간혹 잡티처럼 끼어있다. 일행들로부터 셀카의 여왕으로 추대된 ‘집시여인’이 셀카봉을 쭉 뽑아들고 촬영삼매경에 빠진 모습. 고압적인 자세가 한결같은 카페지기 ‘몽
블랑’, 배불뚝이 ‘소쩍새’, 여자 밝히는 ‘단백질’…… 주어진 시간에 경쟁적으로 관광지의 포토 존에서 촬영해야하니 그럴 수밖에.
여행의 예약과 결재는 카페지기를 통해서 해야 했다. 싱글들을 위한 카페였으므로 여행 그룹에 부부가 들어가서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여행을 가는 건 싱글이 아니어도 된다고 카페지기는 말했다. 출발 당일 밤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의 모임장소로 갔을 때 덩치 좋은 60대 초반의 남자가 “윤슬님?”하고 그녀를 불렀다. 초면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매서운작은 눈과 거만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그가 보통은 아닌 사내라고 느꼈다. 그의 앞에서 주의사항을 듣는 카페 회원들은 모두 굳은 얼굴들이었다. 예상과 달리 40대 이상 50대가 대부분이었다. 더러 60대도 있는듯했다. 싱글들이라 해서 20,30대의 처녀들을 기대했던 남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카페지기 ‘몽블랑’이 일장 연설을 끝내자 교주처럼 명령했다.
“모두 일렬횡대로 서세요! 여기 모르는 분들도 있으니 한 사람씩 옮기면서 서로 자기 닉을 소개 하세요.”
그녀와 남편은 그들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윤슬입니다.”
그녀가 닉을 소개하며 인사하고 그가 덧붙였다.
“안녕하세요. 윤슬님 동행입니다.”
카페에 가입하지 않은 그는 눈치가 보였는지 남편이라 하지 않고 동행이라 소개했다. 몽블랑은 다시 소리쳤다.
“모두 원을 그리고 서서 옆 사람의 손을 잡으세요!”
그녀는 옆에 선 땅딸막한 배불뚝이 남자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자아, 다 잡으셨죠?” 몽블랑이 다시 확인했다. 할 수 없이 옆 남자의 축축한 손을 잡았다. 그녀와 남편은 모르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손을 앞뒤로 흔들며 그들의 강령 같은 것을 복창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는 교양인이다”, “우리는 예절 바르다”,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는 문화인이다” 등등.
“아, 여기 물이 왜 이러냐.”
남편이 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 또한 함께 한 일행들의 면면을 보고 기운이 빠졌다.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 아닌가. 살뜰한 아내로부터 관리 받지 못한 티가 나는 배 나오고 제멋대로인 나이든 독신 남자들. 남자들보다 더 많은 여자들. 성형과 시술로 나이를 감추고 있지만 그로 인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부류와, 여자로서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듯이 염색도 안하고 화장기도 없는 부스스한 몰골의 여자들로 나뉘었다. 그나마 여행사측에서 모객된 9명이 합류할 것이며, 두 커플이 포함돼있다는 말에 내심 기대를 걸었다.
사진을 보니 어디서나 셀카봉을 쭉 내밀며 “스마일! 김치! 찰칵!”하며 포즈를 취하던 ‘집시여인'의 모습이 꽤 많이 들어있다. 머리를 와인색으로 염색하고 피부에 무슨 시술을 했는지 주름이 하나도 없이 통통한 입술의 여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나중에 그녀가 고백하기로는 환갑이라고 했다). 소녀풍의 옷을 입고 있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기분이 묘했다. 목소리를 성형할 순 없나보다. 그래도 화합이 될 듯 안 되는, 정상인 듯 정상 아닌 카페의 분위기에 감초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중국의 배불뚝이 중 포대화상을 닮은 소쩍새. 늘 허허 웃음을 달고 있지만 천방지축인 중늙은이. 그는 식수로 사용하는 어느 마을의 샘물에 맨발로 들어가 반바지까지 적시며 첨벙대고 놀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남편의 사진 속에서 그는 반바지가 젖은 채 브이 자를 그리며 웃고 있다.
‘단백질’은 40대 초중반의 사내로 키가 작은 근육질의 남자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슬라브족 미녀만 보이면 전라도 억양의 짧은 영어로 함께 사진 찍기를 종용했다. “포토 투게더 잉?” 대부분의 여자들은 웃으며 함께 찍는다. 사진을 함께 찍을 때 그의 손은 서슴없이 튜브탑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벗은 어깨나 허리에 걸쳐 있어서 보는 그녀가 다 불안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무례한 도촬도 서슴지 않았다. 남편이 도촬하는 그의 모습을 다시 도촬한 사진도 있다. 우연히 그의 뒤에 있다가 탱크탑을 입은 구릿빛 미녀의 가슴께를 스마트폰으로 줌인해서 찍는 걸 그녀도 본 적이 있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관광을 마치고 배를 타고 근처 로쿠룸 섬의 누드비치를 지날 때였다. 갯바위에 누워 선탠을 하거나 돌아다니는 벌거숭이들이 언뜻 군집 원숭이들처럼 보였다. 일행들은 누드 남녀들을 찍으려고 모두 뱃전으로 몰려 난리 법석을 떨었다. 찍은 사진들을 서로 비교해 보며 노골적으로 품평을 하는 나이든 남녀들의 모습이야말로 옷을 입은 원숭이들처럼 보였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꺼내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지만.
여자들은 여자 친구와 함께 온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게 역력했다. 며칠 지나자 남자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젊은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중적으로 관심을 받는 1번 여자와 2번 여자가 누군지가 드러났으며, 남자들 사이의 모종의 긴장감도 전해져 왔다. <짝>이라는 없어진 TV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나이 든 여자들 중에도 몇몇은 그런 의도를 숨기진 못하는 거 같았다. 딱 봐도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온몸이 준비 완료 단계에 있는 여자들. 얼굴을 무기로 쓰기 위해 리모델링하거나 유방 확대술을 단행한 여자들을 그녀는 유심히 보았다. 나이 들어서도 짝짓기를 위해 전력투구하다니. 혼자 산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25년 지기 친구, 아니 연애 기간까지 30년 지기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우정이나 육친애에 가까운 감정은 불필요한 감정과 에너지 낭비를 막아준다.(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