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독서, 책 읽는 버릇
글 정복근 ㅣ 극작가. 1946년생
희곡 『나는 나다』 『실비명』 『이런 노래』 등
내가 독서의 맛을 알기 시작한건 초등학교 3, 4학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 창성동에서 살 때 허영자 조산원 앞길에서 옥인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만화나 소설책 등을 빌려주는 대본집이 있었다. 온 식구가 볼 책들을 한보따리씩 빌려 와서, 눈 내리는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서 읽던 장면들은 내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어른들은 시국얘기, 금방 읽은 책들에 대한 얘기로 열을 올리셨고, 나는 이불 속에서 금방 읽은 책속의 골목골목을 헤매다가 잠이 들고는 했다.
그때는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아이들을 문자 그대로 훌륭한 인간으로 키우려는 열정이, 사회의모든 곳에 가득했고, 특히 출판물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 같다. 부유함이 아직은 천박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빈곤도 나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던 사회적 분위기가 배어나서 당시는 분하고 슬픈 이야기들도 향기를 품고 있었다.
광화문에 처음 대형 서점이 생겼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넓디넓은 서점에서 책을 읽고 사고, 그 옆의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고, 그 옆의 아는 분 옷가게에서 친구들을 만나 세종문화회관으로 공연을 보러 갔었다. 좋은 공연을 보고 나오던 어느 날 저녁,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소극장 부근 계단에 앉아서한심한 약속을 하던 기억이 난다. 이 다음에 죽어서 귀신이 되면 괜히 집으로 찾아가서 가족들 놀라게 하지 말고, 늘 하던 대로 교보에서 만나서 책을 보고 이 자리에서 이렇게 차를 마시자고 했었다. 부근의 그 좋은 나무들이 다 베어져서 살벌한 광장으로 변한 다음에, 우울히 그 약속을 파기한 건 또 한참 뒤의 일이다.
평생 책벌레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지만, 책이 사람의 일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책은 몇 날, 몇 년을 두고 온갖 생각을 하게하고, 얕은 재미에 홀려 밤새워 읽은 어떤 책은 다음 날 온종일 사람을 후회로 성나게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베스트셀러들이 그냥 그랬던 적이 있기도 했고, 초라한 옛날 장정들 판본으로 읽은 강경애, 백신애 선생들의 작품이 주던 냉엄한 정신에 등이 꼿꼿해지던 기억도 있다. 읽은 책을 몇 번씩 읽고 또 읽다 은연 중 드러나는 작가의 내면을 보는 것도 오랜 독서습관의 한 재미다. 시공을 건너뛰어, 옆 눈으로 바라보며 그 작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듯한, 스토커처럼 은밀한 기쁨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그런 탐닉들이 결국 탐욕에 가까운 집착이며 중독증상일 뿐임을 깨달은 것은 최근이다. 그렇게까지 몰두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주 생각한다. 나이 들면서 짙어지는 건 소유의 부끄러움이다. 가진 게 없는 것 같아도,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보면 쓸데없는 것들을 아직 너무 많이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름이 가기 전에 나머지 책들도 대강 다 치우리라 결심하면서, 나는 그래도 평생 읽었던 그 많은 책들로부터 한가지 가르침은 확실하게 얻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불확실하고, 부도덕하며 아이들 기르기에 더 할 수 없이 위험한 시대를 향해서 한결같은 어조로 말하는 것 같다. 새로운 유행, 새로운 패러다임의 온갖 정치적, 사회적 처방에도 불구하고 결국 올바른 것만이 안전한 길이며,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나 올바름을 지켜야하고, 조금 촌스럽고 고루해 보일 위험이 있을지라도 세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올바름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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