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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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컴퓨터 글쓰기와 퇴고
글 윤금초 ㅣ 시인, 민족시사관학교 대표, 《정형시학》 발행인. 1941년생
시집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무슨 말 꿍쳐두었니?』 『앉은 뱅이꽃 한나절』 등
퇴고라고 하는 말은 중국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로 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다 (僧推月下門)>의 ‘밀다(推)’를 ‘두드린다(敲)’로 고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한유(韓愈)를 만나 그의 조언으로 ‘두드린다’로 고쳤다는 고사에서 추고(推敲)가 아닌, 퇴고(推敲)가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당대를 풍미했던 문장가였다.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은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체(元白體)로 유명하다.
이 얘기는 백낙천(백거이의 다른 이름)과 얽힌 에피소드 한 대목이다. 하루는 백낙천이 이웃 친지들, 즉 문인묵객(文人墨客)들을 불러 모아 시회(詩會)를 열었다. 칠현금(七絃琴)을 뜯어가며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연구를 위한 모임에서 한 제자가 백낙천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화선지에 붓만 대면 절창인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선생님은 퇴고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퇴고는 무슨 놈의 퇴고! 자고로 시란 즉흥적이고 즉물적인 게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내는 것이지. 모름지기 시란 순간의 포착이 중요한 것이야. 순발력이 없으면 아예 시를 짓거나 흉내 내려고 덤비지 말아야지.”
술잔이 여러 순배 돌고 흥취가 일 만큼 거나해진 백낙천이 화장실에 간 뒤였다. 그가 깔고 앉은 방석이 유난히 도도록 불거져 있었다. 시회에 참가한 한 문하생이 백낙천이 깔고 앉은 그 방석을 들추자 아뿔싸! 방석 밑에는 그날 발표한 백낙천의 시문 초벌 원고와 무수하게 개칠을 거듭했거나 고쳐 쓴 흔적이 역력한 파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천하의 백낙천도 남몰래, 그리고 무수하게 퇴고를 했다는 일화 한 토막이다.
「오발탄」, 「학마을 사람들」의 작가 이범선(李範宣,1920~1982)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한 사람 작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키 높이만큼 습작 원고 파지를 버려야 한다”고. 그만큼 절차탁마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문장은, 특히 시문학은, 백낙천이 말한 ‘즉물적인것’이거나 ‘순간의 포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경우에 따라서는 즉물적 발상법이나 직관적 어프로치가 필요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써서는 또 고치는 무수한 퇴고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한 편의 글은 완성되는 것이다.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인과 바다」를 200번이나 고쳐 썼다지 않은가. 어디 한번 상상을 해보라. 소설 한 편을 두고 20번도 아니고 200번을 고쳐 쓴다는 일을. 웬만한 사람은 똑같은 작품을 세 번만 고쳐 쓰라고 해도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고 신물이 난다고 고개를 가로 저을 텐데 200번이라니! 웬만큼 독한 마음먹지 않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을 헤밍웨이는 해냈으며, 그런 끈질기고 피나는 절차탁마의 노력, 더 나아가 200번에 걸친 퇴고 작업 덕분에 영광의 노벨문학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상상이 가능하지 않은가.
소설가 이호철 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편소설 「닳아지는 살들」을 집필할 때였다고 한다. 소설도입부를 20장 정도 초안하고 나서 더 이상 다음 줄거리를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상상력이 바닥나고 영감의 고갈 현상에 부딪쳤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워가며 끙끙거렸지만 ‘줄거리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고 이야기 진척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설 집필을 중단, 초고 노트를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난 후 문득 「닳아지는 살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마치 신들린 것처럼 소설의 가닥이 술술 풀려 나갔다. 책상 서랍 깊숙이 묵혀 두었던 초고 노트를 다시 꺼내 단숨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저 유명한 동인문
학상을 수상하게 된 동인(動因)이었고, 그 작품이 바로 「닳아지는 살들」이었다고 고백했다.
요즘 컴퓨터 글쓰기와 스마트 폰 글쓰기가 보편화되면서 ‘존재의 가벼움’을 드러낸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량생산, 발 빠른 순발력 이런 것들이 산업화 사회의 필요한 덕목이겠지만, 덜 숙성된 ‘날것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다. 정신노동의 총체랄 수 있는 글쓰기는 디지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방식이 적절하지 않을까. 소설의 경우 작업량이나 원고 분량이 워낙 많고 서사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예외로 칠 수 있다. 그러나 시 문장은 연필심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쓰듯 백지 위에 초벌 원고를 작성한 다음 그것을 이리 고치고, 저리 다듬고 퇴고를 거듭한 뒤 컴퓨터에 입력하는, 그 아날로그 방식이 아직도 유효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피를 잉크(Blood lnk)’로 녹여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