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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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한국전쟁과 김수영의 생환
글 이영준 ㅣ 평론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1958년생
저서 『김수영육필시고전집』, 논문 「꽃의 시학: 김수영 시의 꽃 이미지와 언어의 주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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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28일, 한편에서는 한국전쟁 휴전을 위한 회의가 간헐적으로 열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던 시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민간인들 중 일부, 약 2백여명이 충청남도 온양, 온천 지역 한가운데 위치한 국립구호병원에서 석방되었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4만여 명의 민간 억류자들 중 미군이 세 번째로 석방시킨 민간인들 속에 시인 김수영이 있었다. 그는 석방 몇 달 전 면회 온 어머니를 통해 식구들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안으로 가는 기차가 곧 떠날 텐데도 그 기차를 타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온양의 거리를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25개월의 포로수용소 수감자 생활에서 해방된 자유의 몸인데 왜 그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았을까? 그는 왜 몇 시간 동안 낯선 온양의 길거리에서 서성대야만 했던가?
1950년 8월 3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피난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 시인, 소설가 등, 문화계 인사들을 징발하여 의용군에 입대시켰다. 이들 중에 김수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29세. 「묘정의 노래」, 「공자의 생활난」, 「아메리카 타임지」 등 수 편의 시를 발표한 젊은 시인 김수영은 결혼지 몇 달 안된 신혼의 몸이었다. 부인은 임신 중이었으나 시인은 의용군에 입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북원리에 설치된 훈련소까지 걸어서 갔다. 그 훈련소는 김수영에게 지옥이었다.
열여섯 살 먹은 분대장이 내뱉는 욕설을 들어가며 고초를 겪던 김수영은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9월 28일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는 하루 만에 체포됐다. 그가 무슨 이야기로 훈련소를 이탈한 데 대한 변명을 둘러댔는지 우리는 모른다. 캄캄한 밤, 야산에 파묻었던 소총과 군복을 겨우 찾아내어 즉결처분을 면했다. 한 번 탈출을 시도했던 훈련소는 그에게 더 이상 견딜만한 곳이 아니었다. 약 열흘 후 10월 11일, 유엔군의 평양공습 소식을 들은 김수영은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성공했다. 갈라져 피가 흐르는 발바닥을 동여맨 채 잘못 먹은 음식으로 설사를 하면서 그는 걷고 또 걸었다.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 신막까지 도달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약 2백 킬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니까 하루 평균 30킬로미터를 걸은 셈이다.
신막에서 미군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가 10월 28일 저녁 무렵. 서대문 사거리에서 선 그는 살았다는 느낌보다 죽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두 달간 인민의용군의 신분이었던 것. 그가 서대문에서 눈앞에 보이는 파출소로 곧장 들어가 자수하는 장면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만류하는 경찰의 충고를 거절하고 집이 있던 충무로까지 걸으면서 김수영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해군본부 앞에서 검문에 걸리고 체포된다. 체포된 그가 어떠한 폭력을 당했는지 우리는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다리에는 구더기가 나오고 있었고 그걸 본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한다고 말했다는 걸 알수 있을 뿐이다.
그가 이태원의 육군병원에서 인천의 포로수용소를 거쳐 부산의 거제리 야전 구호소로 옮겨간 것이 11월 10일. 1952년 봄에 약 두어 달 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옮겨간 기간을 빼고 석방될 때가지 20개월 정도를 부산 거제리 포로병원에서 지냈다. 이 병원에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여인을 만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성서를 읽은 듯하다. 하지만 그가 가족이나 친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생각할 수도 없었고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고 쓰고 있다. 그곳은 딴 세계였다. 그래서 돌연 석방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마냥 기뻐하지 못하고 온양 온천 거리를 몇 시간 동안 배회했다. 남한 땅이 그를 따스하게 받아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인의 모습은 참혹하다. 당시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는 포스터였다. 그도 자신의 생존과 귀환을 환영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환대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향이라든가 집이라든가 가족이라든가 친구라든가, 이러한 것들은 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디에 속한다는 느낌을 준다. 일정 기간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맺어온 관계는 그 관계를 통해 한 인간에게 정체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김수영에게서 그런 느낌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김수영이 징집당해 북으로 끌려가고 나서, 신혼의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인 채 피난길에 올랐다. 전쟁 중에 출산한 아내는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었고 드디어는 김수영의 귀환을 포기하고 김수영의 친구인 이종구와 동거에 들어갔다. 다른 가족들도 이 전쟁의 와중에 평소 병약하던 김수영이 살아 돌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김수영의 귀환을 포기한 것처럼 그 자신 또한 가족과 친구들을 포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죽음의 시간을 넘어, 2년이라는 시간을 포로수용소에서 보낸 뒤, 온양 온천의 거리에 서서 자신이 자유의 몸이라는 상태를 채 받아들이지 못한 김수영은 몇 시간 동안 자신의 현 상태를 검사해보듯 거리를 걸어 다녔다. 북한의 훈련소를 탈출하여 서대문에 도착했던 때를 생각한 것일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고 북한 의용군에 한때나마 몸담았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 김수영의 심사가 기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남한 사회에 대한 김수영의 입장은 2년 전, 북한군 훈련소를 탈출해서 서대문 네거리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에 잘 나타난다.
그 당시의 느낌에 대해 김수영은 이렇게 쓰고 있다.
“살고 싶다는 의욕과 인제는 살 가망이 드디어 없어졌다는 새로운 절망의 인식이 동시에 직감적으로 나의 가슴을 찌르고 지나간다. 공연히 서울에 돌아왔다는 후회조차 드는 것이었다.적십자병원 앞을 지나가는 수인(囚人)의 대열·적구(赤狗)다. 나는 몸이 오싹 추워졌다. 벌벌 떨리었다.”
적구(赤狗), 빨간 개. 당시 빨갱이를 부르는 말로 널리 쓰였다. 그가 빨갱이든 아니든, 그는 빨갱이로 의심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북한 의용군에 강제로 징집 당했고 탈출했다는 진술을 믿어주던가 믿어주지 않던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가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위해, 김현의 표현을 빌자면, ‘절규’해야만 했던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자유가 없는 나라, 자신의 꿈과 감정, 그리고 내면의 진실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나라는 노예들의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김수영은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숙망(宿望)’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2) 그리고 그 숙망은 한국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은 김수영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몇 번이나 넘나들게 만들었다. 그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고르는 기준으로 ‘죽음의 극복’을 내세웠고 작고 전 얼마간 책상머리에다 ‘상주사심(常住死心)’이라는 구절을 써놓았다고 부인은 말한다. 김수영의 죽음의 사상은 단지 삶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관념의 소산이 아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를 경험한 그는 삶이 제공하는 새로운 세계가 진정 새롭기를 원했고 그것은 식민지를 경험하고 분단과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공유한 사상이었다. 한국전쟁은 남한을 세계에서도 희유한 반공국가로 탄생시켰지만 다른 한편에는 위대한 시인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시인의 시는 우리의 삶이 매순간 죽음을 넘어 신생의 세계를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1) 김수영,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 《세계의 문학》 겨울호, 2009, 124쪽
2) 김수영, 「시인이 겪은 포로생활」, 《근대서지》 제2호, 2010, 409-41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