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그리운 것들, 그리운 것들 -명동백작 박인환 시인

고희의 청년작가 한수산

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린다 엘러비와 99 마리의 양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시1 시2

카이로스의 머리카락 이태원에서

넋이로세 넋이로세

컴퓨터 글쓰기와 퇴고 독서, 책 읽는 버릇 번역의 다채로움에 대하여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텍스트의 위기와 이유 없는 침묵

한국전쟁과 김수영의 생환

풍자의 가장 자유로운 방식

권장도서 바람을 탄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

무명(無名)을 자처한 선비의 조선후기 사회평론

욕망과 좌절과 위안이 담긴 우리가 읽은 세계 위인전

「2015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외

21세기 신택리지

금남로, 텅 빈 절대공동체의 중심

글과 사진 김형중 ㅣ 평론가,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8년생
평론집 『켄타우로스의 비평』『변장한 유토피아』『단 한 권의 책』『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등

선연하도록 붉고 고운 꽃 이파리를 입에 물고 그들은 대관절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고.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은 왜 아무도 돌아오지 않느냐고.
- 임철우, 「직선과 독가스」

전혀 사적이지 않은 거리
폭설 내리던 어느 겨울밤, 차도 다니지 않는 대로에 눈이 쌓이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난생 처음 외제 맥주를 얻어 마시던 광주빌딩 14층의 카페 이름은 ‘아방가르’였다. 머리숱 적은 N형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 흰소리만 늘어놓아도 반갑게 맞아주던 음악다방 이름은 ‘오래된 시계’였고, 고3 학력고사 마치고 불량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미팅이란 걸 처음 해 본 레스토랑은 ‘화니 백화점’ 옆 ‘백록’이었다. 책 살 돈이 없어 서가에 꽂힌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여러 차례 뽑았다 꽂았다만 하다가 결국 아쉽게 돌아서곤 했던 서점 이름은 ‘삼복서점’이었고, 고등학교 시절 음악 선생이 출연한다며 대뜸 표를 떠맡기는 바람에 취향에도 없는 오페라 <춘향전>을 보러 갔다가 언제 어떻게 박수를 쳐야 할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던 곳은 ‘남도예술회관’이었다.

‘금남로’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이다.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웬일, 저 기억들 중 그 어떤 것도 엄밀하게는 금남로와 무관하다. 서점이나 극장이나 레스토랑은 다 ‘충장로’에 있었고, 남도예술회관과 음악다방들은 ‘예술의 거리’에 있었다. 정작 금남로는 정확히 이 두 거리 가운데에서 왼편으로 충장로와 오른편으로 예술의 거리를 구획하고 있었을 뿐, 먹고 마시고 볼 것들은 없는 차로다. 그러니까 충장로와 예술의 거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곳이지만(버스와 택시와 지하철이 이 길 위아래를 달리므로), 정작 거기서는 할 게 별로 없는, 말 그대로 대로(大路) 이다. 아니, 말이 대로지 실제로는 왕복 6차선 도로에 양 옆으로 난 인도를 포함해도 그 폭이 한 30m 쯤밖에 되지 않고, 그리 길지도 않아서 5가가 시작되는 발산교 앞에서부터 길의 끝인 1가 아시아문화전당까지 다 합쳐봐야 고작 3km가 되지 않는다. 연애와 사교와 쇼핑은 충장로에서, 문화생활은 예술의 거리에서. 그런 식으로 금남로는 애초부터 전혀 사적인 거리가 아니었다.
광주은행 본점을 비롯한 여러 금융기관들과 온갖 관공서들, 언론사들이 밀집해 있었고, 옛 고속버스 터미널도, 중요한 시민단체 사무실들도 대개는 금남로 주변에 있었다. 길이 끝나는 구 도청 뒤로는 인쇄 골목과 유곽(공창이나 다름없었다)이 있었고, 조금 더 멀리로는 남광주역이 있어서 온갖 수산물들을 담은 나무 상자들이 기차에서 부려지자마자 남광주시장 가판대에 비린내 나는 그대로 진열되기도 했다. 시장 아래 허름한 골목길을 조금 내려오면 이제 곧 머리를 박박 밀어야할 장정들이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던 병무청도 있었다. 게다가 길은 거기서 다시 전남대 병원과 조선대로, 그리고 화순으로 이어졌다. 그랬으니 금남로는 광주 시민이나 전남도민이 공적인 용무를 보기 위해서는 거쳐 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곳이었다. 금남로는 완전히 공적인 거리였던 셈이다.

6월과 5월의 거리
구도청이 자리 잡은 위치도 참 절묘했다. 도시계획이라고는 도청 자리 하나만을 염두에 두었다는 듯, 하얀 벽돌로 된 이 건물은 금남로가 시작되는 1가 맨 끝에 무슨 바리게이트처럼 저 먼대로를 굽어보며 육중하게 서 있었다. 별로 크지도 높지도 않은 그 건물의 육중함은 참 이상했는데, 자리 잡은 위치와 앞에 거느리고 있는 넓은 원형 분수공원 탓에 인근의 그보다 훨씬 높은 고층빌딩들을 압도했다. 그것의 위용은 다소 적대적이었고, 길의 끝에서 길의 연장을 막고 있는 형세여서 항상 넘어서거나 허물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랬으니 1980년 5월이나1987년 6월에, 아니 이후로도 오랫동안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굳이 도청을 목적지 삼아 금남로로 몰려들었던 데에도 이유는 있었던 셈이다.
처음 그 거리에 구호를 외치며 뛰어들던 날, 긴장과 두려움에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던 심장의 박동을 기억한다. 날아가던 돌들과 화염병의 궤적도 기억하고, 매운 최루탄 연기에 눈을 뜨지못하는 내 손에 치약을 짜주던 여학생의 얼굴 표정도 기억하고, 우리들을 나무라거나 응원하던 시민들도 기억한다.

1987년 6월 중순의 어느 날은 그보다 더 선명히 기억한다. 20만이라고들 했다. 금남로 1가 구광주은행 본점 사거리에서 경찰의 바리게이트를 밀어내고 네 방향에서 전진해 온 군중들이 서로 만났던 순간, 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고작 ‘아리랑’과 ‘애국가’였다. 방석복과 투구를 빼앗긴 전경들이 군중들 앞에 꿇어 앉아 있었고, 멀리 도청이 보였고, 이것은 ‘승리’란 생각이 들었고, ‘역사’란 단어가 자꾸 떠올랐고, 그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고, 인간이란 종이 대단해 보였고,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내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훗날 나는 마르쿠제를 읽으면서 그런 감정의 정확한 명칭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에로스 효과’(eros effect)였다. 합쳐지는 것의 위대함이 내 몸 속에 일종의 ‘획득형질’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사람들이 합쳐지는 장면, 목소리가 더해지는 장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장면을 보면 어김없이 콧날이 시큰해진다. 다 금남로에서 얻은 획득형질이다.
‘획득형질’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이 딱히 나만의 것은 아닐 줄 안다. 게다가 광주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이 형질은 그 연원이 80년 5월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생물학의 통설과는 달리 전염되기도 하고 유전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80년 5월에 대한 가장 감동적이고 정확한 기록들중 하나인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최정운은 당시의 금남로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곳에는 사유재산도 없었고, 목숨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고 시간 또한 흐르지 않았다. 그곳에는 중생의 모든 분별심이 사라지고 개인들은 융합되어 하나로 존재했고 공포와 환희가 하나로 얼크러졌다. 그곳은 말세의 환란이었고 동시에 인간의 감정과 이성이 새로 태어나는 태초의 혼미였다. 그런 곳은 실제로 이 땅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저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절대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삼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것들이 잊히거나 무뎌졌지만, 광주는 끝내 금남로가 뿜어내는저 ‘절대공동체’의 자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광주 사람들이 보여주는 다소 집요하고 배타적이고 고립적인 정치 감각, 머리보다 가슴에 휘둘리는 삶의 태도, 자주 분노하고 쉽게 울어버리는 성향 들은 다 금남로에서 비롯되었다. 설사 어느 순간 그 경험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거나, 광주를 떠나 살게 되거나, 심지어 80년 5월에 광주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그날들 이후 ‘금남로’라는 거리의 명칭은 실제 거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일종의 ‘실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책감과 분노와 우울과 원한 등등의 어마어마한 감정 지출을 요구하므로 대면하기 매우 두렵지만 그렇다고 결코 떨쳐버릴 수도없는 실재. 금남로는 항상 그런 식으로 광주 사람들을 호명했다.

텅 빈 절대공동체
많은 총탄을 맞으며 도청 앞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지켜보았던 전일빌딩(정당하게도 누군가 그 건물에 큰 글씨로 ‘Love Life’라고 써 놓았다)은 이제 낡았고, 도청은 무안으로 이사 갔다. 구도청 건물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허물어졌고 그 아래 ‘문화전당’이라는 거대한 지하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광주 시민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 치 과장 없이 ‘폴리스(polis)’ 그 자체였던 분수 광장은 ‘정비’ 중이고, 그래서 거리는 어딘지 모르게 난삽하고 어수선하다. 이제 충장로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7080 축제 때나 사람들로 붐비고, 예술의 거리는 허름한 표구점들만이 지키고 있다. 그렇게 금남로 인근도 오래된 구도심들이 흔히 그렇듯 공동화가 진행된 지 오래다. 그러나 텅 비었다고 중심이 될 자격이 없어지는 것일까. 몸에 각인된 거리는 결코 이전하는 법이 없다고 나는 믿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