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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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단편소설
처음엔 그게 생판 모르는 남자의 콧김인 줄 까맣게 모르고 누군가 자신에게 귓속말을 한 거라고 오해했다. 긴장했고 기대했다. 뭐라구요? 무슨 말이었냐고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는 자신의 눈높이에 걸려 있는 특이한 모양의 귀를 보게 되었다. 아, 그래플링? 그런 종목의 선수들을 여럿 보아왔기에 단번에 이해했으면서도 이렇듯 눈앞에서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남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뭉개진 귀의 남자와 함께 온 남자. 올리브색 추리닝 차림으로 두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던, 그렇다고 주머니가 우부룩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정말 맨손이었다. 그 둘은 단짝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딱 붙어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화장실에 가느라 앉은 자리가 조금씩 바뀌었는데, 사람들 속에서 우연히 뭉개진 귀를 발견할 때마다그녀는 젓가락 짝을 맞추듯 함께 온 남자를 찾곤 했다. 다소곳한 자세 때문에 그는 뭉개진 귀의남자를 따라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 모임은 그랬다. 모임의 반은 아는 사람이었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술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앞장 선 문의 양 어깨가 통로 양쪽에 바듯하게 끼일 정도였다. 가끔 문을 따라 문의 단골집이라는 델 기웃거렸지만 그곳은 처음이었다. 얼핏 듣기로 그곳의 사장은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술은 물론이고 김과 같은 관광기념품도 판매한다고 했다. 덩치 큰 문이 시야를 다 가리는 통에 그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문가에 다다른 문이 별안간 포복절도했다. 대체 뭘 본 걸까. 문이 그렇게 웃은 건 아주 오래 전이었다. 문을 오랜만에 웃게 한 게 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제자리높이뛰기를 하거나 문의 허리춤을 비집고 머리를 들이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문과 함께한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이미 문을 간파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문이 웃음을 터뜨린 이상, 그것이 그녀에게 그렇게 신기하거나 흥미로운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문이 문가로 비켜나자 술집의 내부가 그녀 쪽으로 드러났다. 상황 종료 뒤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는 작은 무대에서 막간을 이용한 공연이 있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무슨 공연이 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무대 앞을 떠나지 못한 채 건배를 제의하듯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린 흥분한 일본인 둘과 부끄럽다는 듯 손수건을 활짝 펴서 눈 아래를 가린 여자로 보아 그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추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실내 장식이랄 게 전무한 홀이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한한 외국인들이 오고 싶어 하는 곳으로 일, 이 순위를 다툰다는 이곳에 아직도 이런 술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큰길에서 겨우 두 블록 정도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누수가 되는 곳은 없는지 천장을 살피는 사람처럼 홀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천장 가운데 달린 조명의 불빛은 가게의 네 귀퉁이까지 가닿지 않았다. 둥근 불빛 밖의 그곳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음습해보였다. 카펫을 깔지 않아 드러난 시멘트 바닥의 마감재는 깨져서 울퉁불퉁했다. 마치 홀어딘가에 수챗구멍이 있고 고르지 못한 바닥 공사로 미처 빠지지 못한 오수가 고여 썩어가고 있는 듯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방금 공연을 끝낸 듯한 젊은 남자가 홀 한쪽에 서서 바지에서 빠진 셔츠 자락을 정리하다 말고 문을 반갑게 맞았다. “최 사장님!” 그의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가게에는 젊은 남자가 둘 있었는데 공연도 하고 웨이터 역할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문에게 묻지도 않은 채 주방으로 가서 뜨거운 물수건과 캔 우롱차, 국산 양주와 작은 병맥주 세 병을 가져와 탁자에 늘어 놓았다. 문은 김이 오르는 물수건을 펴서 얼굴에 덮었다. 안주는 마른안주 하나뿐인 듯, 구절판에 마른 김과 커피를 입힌 땅콩, 프레첼 등이 나뉘어 담겨 있었다. 탁자는 고기 집 탁자처럼 끈끈했고 그 위에 놓인 노래방 선곡집의 비닐 커버들도 끈끈했다. 선곡집을 대충 넘겨보았는데 언제 업데이트하고 말았는지 최근 노래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웨이터들은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도 검게 물들였는데 무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반듯하다 못해 날이 선 듯한 콧대가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너무도 반듯해 부자연스러운 콧대 때문에 그 둘의 얼굴은 연예인 누구누구와 언뜻 닮은 듯 보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한 끗 차로 결과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 같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한때 연예인 지망생들이었다. 둘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술이 떨어진 테이블에 술을 가져다주고 재떨이를 비우고 곡의 번호를 외우고 있다가 노래방 기계의 숫자 버튼을 눌러주었다.
불필요한 동작이 없으면서도 재빠르고 조심성 있는 이들의 움직임이 뭔가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 테이블의 일본 남자가 일어나 “스고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혀끝에서 맴돌던 그 단어가 떠올랐다. 가부키에서 배우의 시중꾼 역할을 하는 ‘구로고’였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무대의 장치를 바꾸거나 인형극에서는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기도 하는데 검은 배경 속에서 검은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웨이터들이 가게의 네 귀퉁이 중 한 곳으로 사라질때면 흡사 검은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 창백한 흰 얼굴 윤곽만 어둠 속에 동동 뜨기도 했다. 그들의 동작은 보자기의 귀와 귀를 딱 맞춰 접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고 절도가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 중 한 남자가 문의 등 뒤로 와서 문의 어깨를 주물렀다. 혈을 제대로 눌린듯 문이, 뜨거운 물을 끼얹은 노인처럼 이상한 탄성을 연거푸 내뱉었다.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문의 어깨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로 우로 천천히 돌렸다. 문은 자신의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그 잔에 위스키를 따라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가 단번에 술을 털어 넣자 마치 안주라도 집어주듯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남자의 셔츠 주머니에
찔러 넣었는데 지금까지 그녀가 봐온 문의 많은 모습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웠다.사람들은 오지 않고 문과 그녀는 반달형 소파 두 개를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위스키를 찔끔찔끔 맛보았다. 홀에는 일본인 팀 말고 다른 한 팀이 더 있었다. 이태원에 있는 한 회사의 회식 자리라는 웨이터의 언질과는 달리 연령대며 복장까지 너무도 다양해서 집안의 큰 행사에 행차한 대가족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차례차례 노래를 예약했고 노래 또한 다양한 연령대를넘나들었다.
홀 안에는 딱 그 사람들뿐이어서 가게의 어두운 곳에서 늙수레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웨이터들과 비슷한 검은색 옷차림에 반듯한 콧대를 한, 얼굴의주름을 기계적으로 편 듯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결코 젊어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용을 한 사람처럼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손끝 하나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머리 중앙에서 발끝까지 뭔가 보이지 않는 꼬챙이같은 것이 꿰어져 있는 듯했다. “혀엉!” 문이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눈에 문과 그 남자의나이 차는 족히 스무 살 이상 나 보였다. 저러다 자기 아버지까지 형이라고 부르겠다, 그녀는 나무라듯 살짝 문을 흘겨보았다. 넉살 좋은 문과는 달리 그녀는 십 년 넘게 만나고 있는 한참 나이어린 후배에게조차 아직 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괴기스럽게 보인 건 검게 염색한 머리카락도 한몫했다. 햇빛을 쬐지 못한 피부가 머리 색깔 때문에 더 창백하게 보였다. 운동량도 많지 않은 듯 문이 앉은 자리까지 걸어가는데 두 다리가 휘청휘청 거렸다. 그가 바로 그 술집의 사장인, 일본인 관광객에게 술을 파는 걸로도 모자라돌아가는 길에 김 선물 세트까지 들려 보낸다는, 수완 좋기로 유명한 그 가게의 사장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문과 사장은 위스키를 마셔댔다. 자신이 판 위스키를 자신이 마시고 있는 셈이 었는데, 정말 보통 수완이 아니었다. 위스키 병이 바닥을 보이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웨이터가새 병을 놓고 빈 병을 가져갔다.
화장실은 건물의 일층과 이층의 계단참에 있었고 남녀 공용이었다. 문을 잘 잠그라는 손글씨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지만 문과 문틀은 아예 맞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아예 여자 손님은 염두에 두지 않은 술집이었다. 오줌을 누면서 그녀는 한기를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을 닦으려고 물을 트니 발등으로 물이 쏟아졌다. 구두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배수 트랩의 한 마디가 빠져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신기한 건 비누였다. 비누받이에 놓인 물에 분 비누 한쪽에 잇자국이 나 있었다. 분명 사람의 잇자국이었다. 치열이 비교적 고른 건강한 이가 분명했다. 대체 누가 비누를 베어 먹었을까. 만취한 사람의 소행이었을 것이다. 먹다 뱉었을까, 아니면 다 먹고 삼켰을까. 이상한 것은 언젠가 비누를 먹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혀 밑으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녀는 선뜩해서 팔짱을 끼고 비좁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홀 왼편으로 주방이 들여다보였다. 작은 주방 안에 눈썹을 검게 문신한 나이 든 여자가 앉아 졸고 있었다. 마른안주가 담긴, 랩을 씌운 구절판들 옆으로 한글과 히라가나가 반씩 섞인 김 선물세트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지주식으로 양식한 김이었다.(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이태원에서
글 하성란 ㅣ 소설가. 1967년생
소설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웨하스』 『여름의맛』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산문집 『왈왈』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등
눈꺼풀 너머에서 일정 간격으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붉고 노란 불빛과 얼핏 눈을 떴을 때 본 뭉개진 귀 때문에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이태원의 그 지하 술집에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문은 어디에 있는 거지? 어서 문을 찾아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 뭉개진 귀가 방금 전까지도 자신의 오른쪽에 줄곧 앉아 있었다는 것, 그녀의 오른쪽 귓불을 향해 콧김을 미풍처럼 내뿜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치 공간 이동이라도 하듯 언제 그가 그렇게 재빠르고 날쌔게 왼쪽의 그 자리로 옮겨가 앉은 건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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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게 생판 모르는 남자의 콧김인 줄 까맣게 모르고 누군가 자신에게 귓속말을 한 거라고 오해했다. 긴장했고 기대했다. 뭐라구요? 무슨 말이었냐고 확인하려 고개를 돌리다가 그녀는 자신의 눈높이에 걸려 있는 특이한 모양의 귀를 보게 되었다. 아, 그래플링? 그런 종목의 선수들을 여럿 보아왔기에 단번에 이해했으면서도 이렇듯 눈앞에서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남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뭉개진 귀의 남자와 함께 온 남자. 올리브색 추리닝 차림으로 두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던, 그렇다고 주머니가 우부룩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정말 맨손이었다. 그 둘은 단짝처럼 보였는데 실제로 딱 붙어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화장실에 가느라 앉은 자리가 조금씩 바뀌었는데, 사람들 속에서 우연히 뭉개진 귀를 발견할 때마다그녀는 젓가락 짝을 맞추듯 함께 온 남자를 찾곤 했다. 다소곳한 자세 때문에 그는 뭉개진 귀의남자를 따라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 모임은 그랬다. 모임의 반은 아는 사람이었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술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앞장 선 문의 양 어깨가 통로 양쪽에 바듯하게 끼일 정도였다. 가끔 문을 따라 문의 단골집이라는 델 기웃거렸지만 그곳은 처음이었다. 얼핏 듣기로 그곳의 사장은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술은 물론이고 김과 같은 관광기념품도 판매한다고 했다. 덩치 큰 문이 시야를 다 가리는 통에 그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문가에 다다른 문이 별안간 포복절도했다. 대체 뭘 본 걸까. 문이 그렇게 웃은 건 아주 오래 전이었다. 문을 오랜만에 웃게 한 게 뭔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예전처럼 제자리높이뛰기를 하거나 문의 허리춤을 비집고 머리를 들이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문과 함께한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이미 문을 간파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문이 웃음을 터뜨린 이상, 그것이 그녀에게 그렇게 신기하거나 흥미로운 일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문이 문가로 비켜나자 술집의 내부가 그녀 쪽으로 드러났다. 상황 종료 뒤였지만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는 작은 무대에서 막간을 이용한 공연이 있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무슨 공연이 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무대 앞을 떠나지 못한 채 건배를 제의하듯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린 흥분한 일본인 둘과 부끄럽다는 듯 손수건을 활짝 펴서 눈 아래를 가린 여자로 보아 그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추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실내 장식이랄 게 전무한 홀이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한한 외국인들이 오고 싶어 하는 곳으로 일, 이 순위를 다툰다는 이곳에 아직도 이런 술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큰길에서 겨우 두 블록 정도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누수가 되는 곳은 없는지 천장을 살피는 사람처럼 홀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천장 가운데 달린 조명의 불빛은 가게의 네 귀퉁이까지 가닿지 않았다. 둥근 불빛 밖의 그곳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음습해보였다. 카펫을 깔지 않아 드러난 시멘트 바닥의 마감재는 깨져서 울퉁불퉁했다. 마치 홀어딘가에 수챗구멍이 있고 고르지 못한 바닥 공사로 미처 빠지지 못한 오수가 고여 썩어가고 있는 듯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방금 공연을 끝낸 듯한 젊은 남자가 홀 한쪽에 서서 바지에서 빠진 셔츠 자락을 정리하다 말고 문을 반갑게 맞았다. “최 사장님!” 그의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가게에는 젊은 남자가 둘 있었는데 공연도 하고 웨이터 역할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문에게 묻지도 않은 채 주방으로 가서 뜨거운 물수건과 캔 우롱차, 국산 양주와 작은 병맥주 세 병을 가져와 탁자에 늘어 놓았다. 문은 김이 오르는 물수건을 펴서 얼굴에 덮었다. 안주는 마른안주 하나뿐인 듯, 구절판에 마른 김과 커피를 입힌 땅콩, 프레첼 등이 나뉘어 담겨 있었다. 탁자는 고기 집 탁자처럼 끈끈했고 그 위에 놓인 노래방 선곡집의 비닐 커버들도 끈끈했다. 선곡집을 대충 넘겨보았는데 언제 업데이트하고 말았는지 최근 노래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웨이터들은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도 검게 물들였는데 무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반듯하다 못해 날이 선 듯한 콧대가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너무도 반듯해 부자연스러운 콧대 때문에 그 둘의 얼굴은 연예인 누구누구와 언뜻 닮은 듯 보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한 끗 차로 결과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 같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한때 연예인 지망생들이었다. 둘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술이 떨어진 테이블에 술을 가져다주고 재떨이를 비우고 곡의 번호를 외우고 있다가 노래방 기계의 숫자 버튼을 눌러주었다.
불필요한 동작이 없으면서도 재빠르고 조심성 있는 이들의 움직임이 뭔가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 테이블의 일본 남자가 일어나 “스고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혀끝에서 맴돌던 그 단어가 떠올랐다. 가부키에서 배우의 시중꾼 역할을 하는 ‘구로고’였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무대의 장치를 바꾸거나 인형극에서는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기도 하는데 검은 배경 속에서 검은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웨이터들이 가게의 네 귀퉁이 중 한 곳으로 사라질때면 흡사 검은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 창백한 흰 얼굴 윤곽만 어둠 속에 동동 뜨기도 했다. 그들의 동작은 보자기의 귀와 귀를 딱 맞춰 접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고 절도가 있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 중 한 남자가 문의 등 뒤로 와서 문의 어깨를 주물렀다. 혈을 제대로 눌린듯 문이, 뜨거운 물을 끼얹은 노인처럼 이상한 탄성을 연거푸 내뱉었다. 남자가 손가락 끝으로 문의 어깨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로 우로 천천히 돌렸다. 문은 자신의 위스키를 한 입에 털어 넣고 그 잔에 위스키를 따라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가 단번에 술을 털어 넣자 마치 안주라도 집어주듯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남자의 셔츠 주머니에
찔러 넣었는데 지금까지 그녀가 봐온 문의 많은 모습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웠다.사람들은 오지 않고 문과 그녀는 반달형 소파 두 개를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위스키를 찔끔찔끔 맛보았다. 홀에는 일본인 팀 말고 다른 한 팀이 더 있었다. 이태원에 있는 한 회사의 회식 자리라는 웨이터의 언질과는 달리 연령대며 복장까지 너무도 다양해서 집안의 큰 행사에 행차한 대가족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차례차례 노래를 예약했고 노래 또한 다양한 연령대를넘나들었다.
홀 안에는 딱 그 사람들뿐이어서 가게의 어두운 곳에서 늙수레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웨이터들과 비슷한 검은색 옷차림에 반듯한 콧대를 한, 얼굴의주름을 기계적으로 편 듯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결코 젊어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용을 한 사람처럼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손끝 하나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머리 중앙에서 발끝까지 뭔가 보이지 않는 꼬챙이같은 것이 꿰어져 있는 듯했다. “혀엉!” 문이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눈에 문과 그 남자의나이 차는 족히 스무 살 이상 나 보였다. 저러다 자기 아버지까지 형이라고 부르겠다, 그녀는 나무라듯 살짝 문을 흘겨보았다. 넉살 좋은 문과는 달리 그녀는 십 년 넘게 만나고 있는 한참 나이어린 후배에게조차 아직 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괴기스럽게 보인 건 검게 염색한 머리카락도 한몫했다. 햇빛을 쬐지 못한 피부가 머리 색깔 때문에 더 창백하게 보였다. 운동량도 많지 않은 듯 문이 앉은 자리까지 걸어가는데 두 다리가 휘청휘청 거렸다. 그가 바로 그 술집의 사장인, 일본인 관광객에게 술을 파는 걸로도 모자라돌아가는 길에 김 선물 세트까지 들려 보낸다는, 수완 좋기로 유명한 그 가게의 사장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문과 사장은 위스키를 마셔댔다. 자신이 판 위스키를 자신이 마시고 있는 셈이 었는데, 정말 보통 수완이 아니었다. 위스키 병이 바닥을 보이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웨이터가새 병을 놓고 빈 병을 가져갔다.
화장실은 건물의 일층과 이층의 계단참에 있었고 남녀 공용이었다. 문을 잘 잠그라는 손글씨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지만 문과 문틀은 아예 맞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아예 여자 손님은 염두에 두지 않은 술집이었다. 오줌을 누면서 그녀는 한기를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을 닦으려고 물을 트니 발등으로 물이 쏟아졌다. 구두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배수 트랩의 한 마디가 빠져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신기한 건 비누였다. 비누받이에 놓인 물에 분 비누 한쪽에 잇자국이 나 있었다. 분명 사람의 잇자국이었다. 치열이 비교적 고른 건강한 이가 분명했다. 대체 누가 비누를 베어 먹었을까. 만취한 사람의 소행이었을 것이다. 먹다 뱉었을까, 아니면 다 먹고 삼켰을까. 이상한 것은 언젠가 비누를 먹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혀 밑으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녀는 선뜩해서 팔짱을 끼고 비좁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홀 왼편으로 주방이 들여다보였다. 작은 주방 안에 눈썹을 검게 문신한 나이 든 여자가 앉아 졸고 있었다. 마른안주가 담긴, 랩을 씌운 구절판들 옆으로 한글과 히라가나가 반씩 섞인 김 선물세트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지주식으로 양식한 김이었다.(후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가을호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