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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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글 김중혁 ㅣ 소설가. 1971년생
소설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미스터 모노레일』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산문집 『뭐라도 되겠지』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 등
요즘 들어 ‘실감(實感)’이라는 단어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실감’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실제로 체험하는 듯한 느낌’인데, 이 단어는 두 가지 용례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첫째로는 허구의 상황이나 가상의 장면을 접했을 때다. 화질이 끝내주는 대형 텔레비전의 화면을 보면서, 영화의 전투 장면을 보면서, 소설에서의 박진감 넘치는 대화를 읽으면서 우리는 ‘실감난다’고 표현한다. 마치 현실을 대하는 듯하다는 얘기다. 두 번째 경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맞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할 때 쓰인다. ‘결혼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거나 ‘상을 받았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거나 ‘마지막 경기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처럼 실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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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어떤 경계’에는 실제로 일어난 일들뿐 아니라 두 가지 종류의 ‘실감 나는’ 감각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 분명하게 벌어진 사건들로만 현실을 채운다면 우리의 현실은 지나치게 좁아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들이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현실’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편파적이다. 우리는 실감하면서, 혹은 실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각을 실감하면서 각자의 현실을 넓혀 나간다.
‘중한일 동아시아문학포럼’의 참가 여부를 물어보는 전화를 받고, 그러겠다고 했던 게 벌써3년 전이다. 포럼이 열릴 예정이었던 시기는 2012년 10월이었고, ‘현실 생활과 창작의 영감’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다음 원고를 보낸 게 2012년 8월 즈음이었다. 9월즈음에 포럼이 취소됐다는 연락이 왔다.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여파 때문이었다. 나는 그러려니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포럼이 재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나는 그러려니 했다. 한 번 취소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앞에 닥치지 않은 현실은, 아직 현실이 아닌 셈이니까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나는 다가오지 않은 현실은 현실로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 눈앞에 닥치지 않은 현실까지도 현실로 포함시킨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달 후의 일을 미리 생각하고,한달 후에 생길 기쁨을 미리 만끽한다면 현실의 기쁨이 넓어질 것이다. 여행을 준비할 때의 기쁨도 그런 것이겠지. 즐거움을 가불해 쓴다기보다 즐거움의 덩어리를 넓게 펴서 편평하게 만들고 더 많은 시간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거겠지. 어쩌면 소설이란 장르에는 눈앞에 닥치지 않은 현실을 미리 예상 가능하도록 해주는 역할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동아시아문학포럼이 열리는 북경으로 출발하기 전날 짐을 다 꾸린 다음 참가 작가들의 발제문을 읽었다. 중국 작가들의 발제문은 대체로 무척 길었다. 발제문에서도 대륙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농을 치고 싶은 분량이었다. 일본 작가들의 발제문은 대부분 간결했다. 한국 작가들의 발제문은 딱 중간 정도의 길이였다. 33명의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각자의 현실과 각자의 영감을 읽으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같은 주제에 대해서 모두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는 (허구의 세계인 웨스테로스 대륙의 이야기이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수많은 가문이 등장한다. 모든 가문에는 자신만의 가언이 있는데, 한 줄의 문장으로 가문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면 스타크 가문의 가언은 ‘겨울이 오고 있다’이고, 라니스터가문의 가언은 ‘나의 포효를 들어라’이고, 마르텔 가문의 가언은 ‘굽히지 않고, 꺾이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다’이다. 나는 ‘현실 생활과 창작의 영감’이라는 주제로 33명의 작가가 쓴 발제문이 여러 가문의 가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제문을 전부 읽고 나자 이것은 작가들의 모임이 아니라 각 성을 대표하는 성주들의 모임 같았다. 자신만의 성이 있고, 자신만의 백성이 있고, 자신만의 전쟁이 있다. 발제문 중에서 일본 작가 이시이 신지(石井慎二)의 글이 눈에 띄었다.
작품을 창작하는 사이, 현실 속의 가족이나 곁을 둘러싼 사회 따위는 전혀 머릿속에 없다.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이 사는 거리나 식구, 친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형식적으로 그 거리나 이름을 빌리는 것뿐이며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거리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라기 보다 허구적인 이름을 지어내는 것이 귀찮아서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을 소설에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현실 속의 가족이나 사회를 뒤로 한 채 박자에 맞추어 소설 속을 헤치고 나간다. 소설 속에 쓰이는 말은 일상에서의 일본어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발을 헛디디면 저편으로 굴러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말들이다. 이야기를 펼쳐가는 가운데,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런 쪽으로 밀어 붙일 수밖에 없는 전개에 빠질 때도 있다.
나는 이시이 신지의 작품을 한 줄도 읽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실감 나는 소설을 위해 실제 감각을 지워버리는 작가의 고백’이다. 중국에 가면 그와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북경에 도착해서 중국과 일본 작가들을 만났을 때 말도 못하게 어색했다(실제로 말도 못했다).며칠 동안 포럼 행사장에서, 호텔 식당에서 여러 번 마주쳤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아침 식사는 먹을 만한지, 북경의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지, 호텔에서 천안문까지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눈인사만 하고 지나갈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농담만 주고받았다.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에 대해서, 한국과 일본의 껄끄러운 과거에 대해서, 한국과 중국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 대해서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과 중국을 대표해서 나온 작가들이 아니고, 33개의 성을 대표해서 나온 성주들이었으니까.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나눈 몇몇 작가들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농담을(다른 작가들은 몰래 숨어서 심도 깊은 작품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주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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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의 마지막 날, 일본 작가 시마다 마사히코의 방에 모여서 많은 작가들이 술을 함께 마셨고,취했다. 누군가 노래를 불렀고, 어떤 작가는 춤을 추기도 했다(나는 아니다). 며칠 동안 눈인사만 하던 사람들이 헤어지기 전날 마음 한구석의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궁금해 하던 이시이 신지 작가와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각자의 성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성으로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나는 문득 그들이 돌아가서 맞게 될 현실이 궁금해졌다. 모옌의 발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영감이 끊임없이 샘솟기를 바란다면 비만을 예방할 때 행하는 것처럼 ‘입을 단속하고 보폭을 크게’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밤중에 들판에 가서 달리기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각자의 성으로 돌아간 후, 어떤 작가들은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갈 것이고, 어떤 작가들은 현실을 지워버릴 것이고, 또 어떤 작가들은 현실을 바라볼 것이다. 이 작가들 덕분에 현실은 더욱 실감날 것이고, 더욱 넓어질 것이고, 깊어질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야 중국과 일본의 작가들을 만났다는 게 실감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