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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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번역의 다채로움에 대하여
글 조현 ㅣ 소설가. 1969년생
소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등
십 년 전 봄,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대 밑에서 비 맞은 새끼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책 꾸러미를 발견했다.
김창석 님이 번역한 정음사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집이었다. 비록 버려졌지만 책을 묶은 단단한 끈과 빳빳한 하드커버에 난 마음이 기꺼웠다. 1985년인가 초판이 나온 이 전집은 당시에도 구하기 힘든 절판본이었으니 그날 이 책을 얻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직장에 약간 일찍 출근한 아침이면 몇 쪽씩 전집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독실한 종교인이 경전을 읽는 것처럼 많을 땐 십여 쪽, 적을 땐 반쪽 정도. 물론 거르는 날도 많았다. 덕분에 제1부인 『스왕네 집 쪽으로』를 그 이듬해 여름까지 일 년 반에 걸쳐서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속도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소설을 쓰는 속도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늦은 나이에 등단을 하고 이런 저런 바쁜 일이 있어 읽는 속도는 더뎌져 이제야 제3부인 『게르망트 쪽으로』를 읽고 있다. 하지만 천천히 읽는 프루스트는 나에게 작은 기쁨이었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에는 이런 구절을 읽었다.
‘사랑과, 사랑에 따르는 번민은, 취기처럼, 외계의 사물의 모습을 우리 눈에 다르게 보이는 힘이 있으니까.’
이런 문장과 더불어 시작되는 아침은 나에게 큰 축복이다. 그리고 작년에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왔다. 김희영님의 새 번역이 출간되기 시작한 것. 민음사의 전집은 표지까지 훌륭해 더욱 기뻤다. 지금 읽는 속도로 보아 김창석 님의 번역을 마칠 때쯤이면 김희영 님의 번역도 완간될 거라 생각한다. 그럼 난 아침마다 새로운 우리말로 다듬어진 프루스트와 마주하게 되리라.
사실 난 번역이란 다채로울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원작에 대한 개성적인 해석이자 변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Gott’를 우리말의 ‘신/하느님/하늘님/하나님’ 등으로 옮기는 것은 각자 고유한 마음의 프리즘을 거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맞고 ‘하느님’은 틀리다는것은 있을 수 없다. 그건 마치 카라얀이 지휘한 베토벤은 맞고 칼 뵘의 베토벤은 틀리다는 말과 같으니까. 분명 베토벤은 하나의 악상을 악보로 표기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숙성시키느냐는 카라얀과 칼 뵘, 그리고 정명훈과 오자와 세이지가 다른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원곡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지휘자나 연주자의 수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루빈스타인으로 쇼팽을 들었다고 그의 녹턴을 안다고 만족하지 않고 아쉬케나지나 루간스키에도 귀를 기울인다. 안개 낀 어느 날은 임동혁이, 비 오는 다른 날은 이반 모라베츠가 마음으로 젖어오는 때도 있다. 그리고 아직 기회가 없었지만 쇼팽을 곱고 나긋나긋하게 잡아냈다는 타마스 바사리도 들어볼 생각이다. 이처럼 모든 원작에는 다양한 해석의 기쁨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건 마치 연보랏빛 라일락이 그가 비추는 광채와 온도, 그리고 습기와 바람에 따라 서로 다른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하듯이.
물론 여러 가지 언어에 재능이 있어 원서를 직접 접하는 것도 좋겠다. 번역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원서와 마주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다년간 첼로를 연마하여 바흐의 첼로 조곡을 직접 연주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 해도 번역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리스머독의 『바다여 바다여』의 첫 대목에는 ‘Near to the horizon it is a luxurious purple, spotted with regular lines of emerald green. At the horizon it is indigo’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 문장에 쓰인 ‘a luxurious purple’이나 ‘emerald green’, 그리고 ‘indigo’의 뜻을 짐작할 수 있지만, ‘수평선 근처는 화려한 보랏빛이며, 에메랄드빛이 규칙적인 무늬를 수놓는다. 수평선은 쪽 빛이다’라고 번역한 안정효 님의 문장이나 ‘수평선 부근은 현란한 자색과 아름다운 초록색이 뒤섞여 있다. 수평선은 남색이다’라고 옮긴 최옥영 님의 우리말에서 각각 다른 기쁨을 느낀다.
그러니 나의 경우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내가 바흐의 첼로 조곡을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기회가 된다면 파블로 카잘스의 연주회에도 참석할 것이다. 그건 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다른 사람이 바라본 세상에는 우열을 가를 수 없는 개성적 가치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번역은 자기 마음의 프리즘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공감 행위이다. 문학의 본질은 세상을 넓고 다채롭게 바라보는 시선에도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