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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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의 청년작가 한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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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엘러비와 99 마리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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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 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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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위기와 이유 없는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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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의 가장 자유로운 방식

권장도서 바람을 탄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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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외

글밭단상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글 오은 ㅣ 시인. 1982년생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저서
『너랑 나랑 노랑』『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등

십여 년 전쯤의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 금방 사람들이랑 친해져요?” 술자리에서 처음 보는 시인이 물었다.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살짝 웃기만 했다. 같은 술자리에서 반대로 이렇게 묻는 이도 있었다.
“시인이 좀 과묵해야지, 그렇게 한시도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면 안 힘들어요?”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렇게 있어?” 평소 친분이 있는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갑자기 말을 건넸다. “응?”이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나니, 정신이 아찔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술자리를 뒤로하고 자리를일찍 떴다. 내 뒤통수를 친 사람이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자리를 파한 이유는 결코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형이 건넨 말을 듣고 또 몹쓸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형이 했던 말 중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표현이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툭 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만 불이 붙어버렸다. 불길이 더 거세지기 전에, 보릿자루가 다 타버리기 전에 집에 가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저 표현은 살면서 실제로 몇 번 듣기도 했고 박경리의 『토지』나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에서 스치듯 봤던 적도 있었다(집에 오자마자 나는 보릿자루를 빌려준 이에게 그것을 갚는 심정으로 기억을 되짚으며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여보았다). 보기도 하고 듣기도 했지만 한 번도 소리 내어 발음해보지 않았던 표현, 눈에는 익었지만 입에 익지는 않았던 표현, 따라서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표현이었다. 말 그대로 꾸어다 놓았기 때문에 잠정적으로는 내 것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남의 것이었던 셈이다.
사전에서는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표현을 쓴다고 했다. 몇몇 정치인과 운동선수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유래를 찾아보니 비밀리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모의하는 자리에서 저 말이 처음 쓰였다고 했다.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촛불도 켜지 않은 밤, 구석에 있는 한 사람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성희안이 박원종에게 이렇게 묻는다. “박 대감, 염탐꾼이 들어와 있소.” 박원종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내일 거사를 위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요.” 보릿자루에 도포를 입히고 갓을 씌워놓으니 영락없이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는 과연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나는 전신거울 앞에 앉아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수그려보기도 하고 몸을 뻣뻣하게 뒤로 젖힌 채 한동안 가만있어보기도 했다.노래하지 않는 새, 헤엄치지 않는 물고기를 그리다 몇 시간 전 술자리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라난데없이 웃음보가 터졌다.
그나저나 보릿자루가 온전히 보릿자루인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 “꾸어다 놓은”이란 규정 없이 그저 보릿자루인 순간 말이다(이처럼 관형어는 대상을 분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제한하기도 한다). ‘가만히 있는 나’나 ‘주눅이 든 나’가 아니라 다소 무람없을지라도 ‘떠들어대는 나’가 아마 본연의 보릿자루에 더 가까울 것이다.
사람들이랑 금방 친해지는 나, 이야기하는 데 힘을 쓰면서 꼭 그만큼의 힘을 얻는 나, 문득문득 호기심이 발동하는 나, 못다 한 말과 묻지 못한 질문 들을 집에 품고 돌아와 백지 위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늘어놓는 나.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백지 위에서 상상한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비로소 몸을 꿈틀대기 시작하는 순간을, 입을 앙다물고 있던 사람이 마침내 그것을 벌려 문장의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을, 나도 모르게 온몸이 통째로 아찔해지는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