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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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무명(無名)을 자처한 선비의 조선후기 사회평론
글과 사진 조운찬 ㅣ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196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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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의 『무명자집』
문집의 이름을 짓는 가장 흔한 방법은 저자의 호밑에 집(集), 또는 문집(文集)을 붙이는 일이다. 『무명자집(無名子集)』도 마찬가지다. ‘무명자’라는 호를 쓴 사람의 문집이라는 뜻이다. 무명자 윤기(尹愭,1741~1826)는 조선 정조~순조 연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왜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를 썼을까. 그는 무명의 삶을 살았다. 86세라는 오랜 삶을 누렸지만,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51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만년에 급제해서인지, 벼슬은 성균관 전적, 종부시 주부, 현감, 찰방, 실록편수관 등 낮은 자리를 전전했다. 생전에 큰 공을 세운 것도 아니요, 큰 사건에 연루된 적도 없어 역사서에 비중 있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호에 걸맞게 무명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 윤기는 ‘무명’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해석 했다. 그는 「가족이 지켜야 할 일(家禁)」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호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평소에 언행
을 신중하지 못하여 남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명씨(無名氏)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고립되어 홀로 살아갔다. 사회적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양반 사대부였으되, 당색을 좇아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당쟁의 사회를 살았지만, 고독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무명자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어두워 아는 지식이 없고, 도모하는 일도 없으니 천하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다”(「벙어리가 되기로 맹세하다(誓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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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 세상에 대한 관찰자이자 기록자
『무명자집』을 접하면, 먼저 그 양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2013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완역 출간된 『무명자집』은 모두 16권이다. 여기에는 2천여 편의 시와 수백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이는 윤기의 후손에 전해 내려온 19책의 『무명자집』을 번역한 것이다. 최근 번역된 개인 문집 가운데 가장 거질일 것이다. 본래는 27책에 달했다고 하는데, 무명자가 생전에 쓴 글의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집은 개인의 기록물이다. 자연히 음풍농월의 시가 많고, 산문에서는 서간문, 기문, 묘지문, 제문, 행장 등특정 사안과 인물에 포폄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자집』은 개인의 문집이지만, 내용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무명자가 제3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무명자집』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무명자집』에는 무명자가 쓴 글이 시기 순으로 실려 있다. 무명자의 문제의식은 19세에 쓴 최초의 산문 「관시설(觀市說)」과 86세에 쓴 마지막 작품 「서측자설(抒厠者說)」만 읽어도 단박에 알 수 있다. 「관시설」은 시장에서 목격한 소동을 기록한 내용으로, 정확한 진상을 모르고분위기에 휩쓸려 행동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서측자설」은 ‘똥 푸는 자(抒厠者)’와 ‘무덤 도굴하는 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3개월째 병상에 누워 있던 무명자는 이 글을 쓴 뒤 11일 만에 숨졌다. 그는 마지막까지 세상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놓지 않은 글쟁이였다.
『무명자집』은 18~19세기를 살아간 한 지식인의 사회평론집이라고 할 수 있다. 문집에는 1765년 3월 영조가공자의 사당에 참배할 때 유생들 사이에 일어난 소동을 기록한 「알성례 중에 일어난 소동(記驚)」, 이순신의 공적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임진년의 일을 논하다(論壬辰事)」,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음험한 마음씀을 폭로한 「오추탄의 사적을 읽고(讀吳楸灘事)」 등 사건과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자 하는 사론(史論)적 성격의 글이 적지 않다. 또 당시에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던 과거제, 담배, 음주 문화등에 대한 논설적인 글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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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과 과거 제도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
무명자 윤기의 생애 가운데 특기할만한 점은 성균관 생활이다. 무명자는 34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성균관에 들어갔다. 대개 20대 초반에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에 비춰볼 때 상당히 늦은 나이다. 그는이곳에서 유생으로 오래도록 공부한 끝에 51세가 되어서야 문과에 급제했다. 17년 동안 문과시험을 보았으니 가장 오랫동안 성균관 생활을 체험한 셈이다.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과거 시험 재수생으로서 고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외의 성과도 있었다. 긴 세월을 성균관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제도와 풍습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성균관의 이야기를 「반중잡영(泮中雜詠)」이라는 시로 옮겼다. 「반중잡영」은 단순히 성균관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시는 성균관의 모습과 운영 상황, 유생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소개해고 있다. 각 시에는 별도의 주석을 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를테면 동재와서재를 읊은 시의 아래에는 이런 주석이 달려 있다.
‘동재와 서재의 상재와 하재가 통틀어 28개의 방이다.맨 아래의 동재·서재 각 두 칸이 하재인데,하재에는 동재와 서재에 각기 10인씩 거주한다.’ 시의 전문은 이러하다.
명륜당 아래의 동재와 서재는
明倫堂下東西齋
28개 방의 창문 서로 마주보게 배치됐네
卄八房窓互對排
진사와 생원은 윗방에 거처하고
進士生員居上舍
하재생 20명은 따로 함께 거처하네
下齋二十自相偕
「반중잡영」은 2백20수로 된 연작 장편시이다. 시에는 성균관의 위치와 반촌의 풍습, 기숙사 규칙, 식당이용방법, 식사 메뉴, 성균관 시험의 종류와 절차 등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또 유생들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권리투쟁인 ‘권당(捲堂, 식사거부)’도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 때문에 이 장편시는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반중잡영」이 『무명자집』의 존재를 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자가 성균관을 기록한 데에는 변질되어가는 성균관의 위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반중잡영」 서문에서 “예전에 융성했던 성균관의 제도와 풍습이 이제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라며 “후인들에게 눈앞의 일을 가지고 본래 모습을 되짚어 보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무명자가 보기에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것은 과거제였다. 수십 차례 낙방의 경험을 맛보았던 ‘늦깎이과거 급제자’인 그는 누구보다도 과거제의 실상과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무명자집』은 ‘과거제 백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과거의 실상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문집에 실려 있는 과거제 관련 조목은 ‘과거제도에 대하여(論科擧)’, ‘과설 12조목(科說十二)’, ‘후과설3조목(後科說三)’, ‘과설 6조목(科說六), ‘과거에 대하여(科說)’ 등 수십 조항에 달한다. 글은 저자가 목도한 과거 시험의 문제점을 열거하고 대책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가운데 답안지 작성 과정의 각종 부정행위, 시험관의 뇌물 수수, 당색에 따른 합격자 안배 등 과거의 비리가 눈앞에 펼쳐 보이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조선의 과거제도는 이미 공정한 인재 선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과거제를 폐지하고 이조, 병조, 관찰사가 직접 인재를 천거해 선발하는 추천제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과거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최근 『무명자집』을 인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무명자집』은 개인 문집 차원을 넘어 조선 후기 과거제의 실상을 알려는 이들에게는 필독 텍스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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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이 빛나는 전방위 글쓰기
무명자의 글쓰기의 폭은 넓다. 역사 기록도 있고,철학적 논변도 있다. 사회를 논평하는 논설문도 있고,주변의 이야기를 채록한 잡문도 있다. 시나 편지글, 행장, 상소문, 책문 등 전통 양식의 글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무명자집』이 돋보이는 것은 글이 단순한 사실, 논평에 그치지 않고 깊은 사유와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돈, 문방사우, 독서, 교육, 소일거리등 일상의 소재를 다루지만, 그의 글에는 깊은 아우라가 있다. 나는 유익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글로 「독서의 순서(讀書次第)」, 「어린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敎小兒)」, 「소일에 대하여(消日說)」, 「돈에 대하여(錢說)」를 꼽고 싶다. 이 가운데 공자와 맹자를 인용하며 풀어낸「어린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은 ‘기다림의 미학’을 일깨워주는 교육론으로 오늘날 자녀 교육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다. 「소일에 대하여」는 노령화 시대를 맞아 노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 좋은 시사를 준다. 「돈에 대하여」에는 ‘동취(銅臭, 구리내의 뜻으로 돈 냄새)’ ‘아도물’(阿堵物, 돈의 별칭)등 돈에 얽힌 흥미 있는 고사가 실려 있다.
무명자의 글쓰기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것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일 것이다.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무명자 역시 성현들의 말을 경구로 삼아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벽에 써 붙였다는 ‘서벽자경(書壁自警)’이 이를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구하여 확실히 안 뒤에 행동하고,증거를 댈 수 있는 경우에만 말한다(參知而後動, 可驗而後言)”는 구절도 있다. 그는 당대를 기록한 기자였다. 그러면서도 유가의 덕목을 생활화했기에 행동은 항상 겸손했다. 무명자는 벽에 자신의 좌우명도 걸었다. “남보다 한 발짝 물러서고, 남보다 한 번 더 머리를 숙이고, 만 길 높이 우뚝 선 벼랑처럼 고결하게 살자(退人一步 低人一頭 壁立萬仞).” 무명자는 이름없는 고독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갔다. 무명자를 역사에 기억하게 한 것은 ‘입언(立言,문장으로 후대에 이름을 남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