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나의 아버지
왕년에 양반가문 출신 아닌 집안이 없듯이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우리들의 아버지는 그대로 가문의 전설이 되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아버지는 혁명가의 전설을 남긴 분들이다. 그 자손들이 아무리가난하고 소외받는 삶을 이어간다 하더라도 가난과 소외 그 자체를 혁명가의 후손이 물려받을 가문의 숙명으로 여긴다. 간혹 변절자의 치욕을 남기더라도 어떻게든 변절의 흔적을 지운 자리에 공덕비를 세우려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들이 얼마나 아버지의 전설에 집착하는가를 알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일본 유학파를 아버지로 둔 자식들도 식민지 지식인의 품격과 비애를 가장 고급스런 아버지의 전설로 물려받는다. 비록 친일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과 멋을 구가하신 인텔리 아버지의 전설처럼 매력적인 유산은 없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 아버지의 전설은 조선 두루마기를 걸친 지사적 풍모이거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거나 멋진 양장 차림의 모던 보이 스타일이기 일쑤였고, 나는 한때 그런 아버지를 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내 아버지는 조선 두루마기를 걸친 독립운동가도 학사모를 쓴 동경 유학생도 멋진 양장 차림의모던 보이도 아니셨다. 내게도 아버지가 남긴 석장의 낡은 흑백사진이 있었지만, 차마 그 옛날 옛적,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식민지 조선에서의 아버지 사진을 어디 공개할 수 없었다. 아마 아버지께 서 어머니 집안에 중매를 넣으시면서 보낸 사진 같은데,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고 노골적이어서 남에게 보여주기 창피했다.
1905년 부산에서 출생하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30대 초반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하시는바람에 외할머니 손에서 성장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부평동 검정다리 근처에서 식당을 했고,전라도에서 넘어온 고씨 성을 가진 노동자에게 재가를 했다. 전라도에서 넘어온 고치복이란 우리 아버지의 의붓아비는 동학 잔당이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근거가 없는 바람의 전설이다. 의붓아비 밑에서 살기 싫은 우리 아버지는 그때부터 집 밖으로 떠도는 외로운 늑대였던 듯하다. 미국인 뚱뚱이 선교사 어을빈을 인력거에 태운 적이 있다는 것, 고려환 배에 올라가 소금 가마니를 져 날랐다는 이야기에서 어릴 때부터 인력거를 끌거나 배에 짐을 져 나르는 노동을 하며 성장한 듯하다.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예쁜 일신여학교 학생이 나눠주는 태극기를 들고 신나게 만세를 부르다가 무지 맞았다는 것. 동래고보생과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헌병에게 붙들려가도 신원이 확실해서 무사히 풀려 나왔지만,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아버지와 친구들은 동네 불량배로 취급당해 죽도록 얻어맞았다는 것. 그때 친구가 맞아 죽어서 구덕산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리 아버지는 십대 소년 시절부터 세상에 내던져져 방목되는 동네 불량배였던 셈이다.
1921년 부산에서 일어난 최초의 노동운동이었던 고려환 배 하역 노무자 파업 당시 아버지는 17세의 어린 노무자로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 글 배운 어른들이 붙들려가고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변절을 할 때, 십대의 어린 노무자 셋이 밤에 배에 올라가 소금 가마니를 닥치는 대로 바닷물에 처넣고 야반도주했다는데, 그때 17세 소년 노무자들이 얼마만큼 멋진 소영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길로 일본으로 밀항한 17세 조선 소년들은 야하다 제철소를 거쳐 오사카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갔고, 무려 15년 동안 일본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 돌아왔다. 그때 귀국한 30대 초반의 아버지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중매쟁이에게 건네준 사진인 듯한데, 어머니가 용케 버리지 않고 보관해 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지난 2007년, 내 나이 쉰여섯이 되어서야 우리 아버지를 전설
로 받아 들였다. 그때 부산 지역 신문인 국제신문에 ‘문화게릴라 이윤택 칼럼 - 세상에 중심이 없으니’라는 고정 칼럼의 첫 번째 연재물로 「근대 백년의 아비사」를 썼고, 이게 우리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공개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상당히 낯설어 했다. 이게 무슨 복장입니까? 흰 파나마모자를 뒤로 젖혀쓰고 짙은 선글라스에 흰 와이셔츠, 양복에 반바지 차림. 그런데 반바지와 목이 긴 양말 사이를 멜빵 집게로 연결시켰고, 백구두에 수금용 손가방. 이 분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셨습니까?
아버지가 중매쟁이에게 건넨 사진은 재일교포 출신 일본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의 갱 영화를
보는 순간 의문이 풀린다. 아버지가 중매쟁이에게 보낸 이상한 차림의 사진은 바로 일본 야쿠자 행동대원 모습 그대로였고, 손가방을 들고 다닌 점으로 보아 수금원이셨던 모양이다.
두 번째 사진은 초량 명태고방 상인 조합원들이 무슨 기념촬영을 한 것인데, 뒷줄 맨 끝 깃발 바
로 곁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아버지가 그림처럼 서 계신다. 어디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겸손하게 서 계시는데, 검은 안경과 무표정한 모습이 어쩐지 서늘한 긴장을 준다. 세 번째 사진은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한 모습인데, 우리 아버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부산 앞바다와 영도 섬 사이를 헤엄쳐 건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인데, 세상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도 좋을 남자가 백주 대낮에 반 벌거숭이로 앉아 카메라를 노려본다. 날카로운 눈매와 작고 단단한 체구에서 만만찮은 기세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벌거벗고 앉아 세상을 째려보는 우리 아버지!
내게 아버지는 항상 일상 저 너머에서 오는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으로 돌면서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신 듯하다. 가끔 집에 오셔도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와 나 사이에 별스런 대화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어색해 하신 듯하다. 누나와 어린 아들에게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으셨다. 나는 나대로 애교를 떨거나 어리광을 피울 줄 모르는 숙맥이라서 아버지 앞에 서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와 아버지와 만나는 둘만의 시간이 있었다. 그건 영화 구경 가는 날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가셨다. 극장의 어두운 의자에 파묻혀 영화를 보는 시간이야말로 내 어릴 적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그 아름다운 기억 속에 대화는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는 가족이란 일상이 낯선 세계였던 듯 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낯설어 하신 듯하다. 평생을 저 혼자 세상을 떠돈 외로운 늑대, 일상은 항상 긴장의 싸움터였고, 도박판이었다.
내가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한 것은 연극을 다시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내 나이 삼십대 말,아버지는 이미 팔순을 넘기면서도 집에 귀가하지 않으셨다. 밖에서 항상 새로운 사업을 벌이셨고 뒤늦게 얻은 내 이복동생들과 함께 사셨다. 나는 언젠가 아버지의 삶을 한 편의 서사시나 드라마로 구성해 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 어떤 제도적 굴레에도 갇히지 않고 살았던 ‘바람의 아들’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생애사적인 서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어떤 질문을 던져도아버지의 대답은 그 어떤 논리와 설명에서 벗어나 있었다.
“관동 대지진이 나서 조선인을 마구 때려죽일 때, 나는 산속 깊이 피신해 있었는데, 그때 만난 아이누 여자와 몇 달 살았다. 지금도 자주 그 아이누 처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그러면서 훌쩍 훌쩍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팔십구 세에 저 세상 가시면서 자신다운 유산을 남기셨다. 이복동생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아버지 시신 밑에 통장과 도장이 깔려 있었다. 통장을 여니 아버지 친필 싸인 펜으로 장례비라 쓰셨고, 달랑 삼백만 원의 저금이 남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장례비만 내놓고 사라지셨다. 비록 혁명가도 동경 유학생도 아니었지만, 한 세상 제 맘대로 살다 깨끗하게 가신 것이다. 참 기막힌 우리 아버지의 전설!
아버지는 전설이다
글 이윤택 ㅣ 극작가, 시인, 연극연출가. 1952년생
희곡집 『웃다 북치다 죽다』 『이윤택 공연대본 전집』, 시집 『시민』 『춤꾼 이야기』,
저서 『영혼과 물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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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아버지는 혁명가의 전설을 남긴 분들이다. 그 자손들이 아무리가난하고 소외받는 삶을 이어간다 하더라도 가난과 소외 그 자체를 혁명가의 후손이 물려받을 가문의 숙명으로 여긴다. 간혹 변절자의 치욕을 남기더라도 어떻게든 변절의 흔적을 지운 자리에 공덕비를 세우려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들이 얼마나 아버지의 전설에 집착하는가를 알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일본 유학파를 아버지로 둔 자식들도 식민지 지식인의 품격과 비애를 가장 고급스런 아버지의 전설로 물려받는다. 비록 친일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과 멋을 구가하신 인텔리 아버지의 전설처럼 매력적인 유산은 없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 아버지의 전설은 조선 두루마기를 걸친 지사적 풍모이거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거나 멋진 양장 차림의 모던 보이 스타일이기 일쑤였고, 나는 한때 그런 아버지를 둔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내 아버지는 조선 두루마기를 걸친 독립운동가도 학사모를 쓴 동경 유학생도 멋진 양장 차림의모던 보이도 아니셨다. 내게도 아버지가 남긴 석장의 낡은 흑백사진이 있었지만, 차마 그 옛날 옛적,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식민지 조선에서의 아버지 사진을 어디 공개할 수 없었다. 아마 아버지께 서 어머니 집안에 중매를 넣으시면서 보낸 사진 같은데,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고 노골적이어서 남에게 보여주기 창피했다.
1905년 부산에서 출생하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30대 초반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하시는바람에 외할머니 손에서 성장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부평동 검정다리 근처에서 식당을 했고,전라도에서 넘어온 고씨 성을 가진 노동자에게 재가를 했다. 전라도에서 넘어온 고치복이란 우리 아버지의 의붓아비는 동학 잔당이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근거가 없는 바람의 전설이다. 의붓아비 밑에서 살기 싫은 우리 아버지는 그때부터 집 밖으로 떠도는 외로운 늑대였던 듯하다. 미국인 뚱뚱이 선교사 어을빈을 인력거에 태운 적이 있다는 것, 고려환 배에 올라가 소금 가마니를 져 날랐다는 이야기에서 어릴 때부터 인력거를 끌거나 배에 짐을 져 나르는 노동을 하며 성장한 듯하다.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예쁜 일신여학교 학생이 나눠주는 태극기를 들고 신나게 만세를 부르다가 무지 맞았다는 것. 동래고보생과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헌병에게 붙들려가도 신원이 확실해서 무사히 풀려 나왔지만,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아버지와 친구들은 동네 불량배로 취급당해 죽도록 얻어맞았다는 것. 그때 친구가 맞아 죽어서 구덕산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리 아버지는 십대 소년 시절부터 세상에 내던져져 방목되는 동네 불량배였던 셈이다.
1921년 부산에서 일어난 최초의 노동운동이었던 고려환 배 하역 노무자 파업 당시 아버지는 17세의 어린 노무자로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 글 배운 어른들이 붙들려가고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변절을 할 때, 십대의 어린 노무자 셋이 밤에 배에 올라가 소금 가마니를 닥치는 대로 바닷물에 처넣고 야반도주했다는데, 그때 17세 소년 노무자들이 얼마만큼 멋진 소영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길로 일본으로 밀항한 17세 조선 소년들은 야하다 제철소를 거쳐 오사카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갔고, 무려 15년 동안 일본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 돌아왔다. 그때 귀국한 30대 초반의 아버지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중매쟁이에게 건네준 사진인 듯한데, 어머니가 용케 버리지 않고 보관해 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지난 2007년, 내 나이 쉰여섯이 되어서야 우리 아버지를 전설
로 받아 들였다. 그때 부산 지역 신문인 국제신문에 ‘문화게릴라 이윤택 칼럼 - 세상에 중심이 없으니’라는 고정 칼럼의 첫 번째 연재물로 「근대 백년의 아비사」를 썼고, 이게 우리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공개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상당히 낯설어 했다. 이게 무슨 복장입니까? 흰 파나마모자를 뒤로 젖혀쓰고 짙은 선글라스에 흰 와이셔츠, 양복에 반바지 차림. 그런데 반바지와 목이 긴 양말 사이를 멜빵 집게로 연결시켰고, 백구두에 수금용 손가방. 이 분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셨습니까?
아버지가 중매쟁이에게 건넨 사진은 재일교포 출신 일본인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의 갱 영화를
보는 순간 의문이 풀린다. 아버지가 중매쟁이에게 보낸 이상한 차림의 사진은 바로 일본 야쿠자 행동대원 모습 그대로였고, 손가방을 들고 다닌 점으로 보아 수금원이셨던 모양이다.
두 번째 사진은 초량 명태고방 상인 조합원들이 무슨 기념촬영을 한 것인데, 뒷줄 맨 끝 깃발 바
로 곁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아버지가 그림처럼 서 계신다. 어디에도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겸손하게 서 계시는데, 검은 안경과 무표정한 모습이 어쩐지 서늘한 긴장을 준다. 세 번째 사진은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한 모습인데, 우리 아버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준다. 부산 앞바다와 영도 섬 사이를 헤엄쳐 건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인데, 세상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도 좋을 남자가 백주 대낮에 반 벌거숭이로 앉아 카메라를 노려본다. 날카로운 눈매와 작고 단단한 체구에서 만만찮은 기세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벌거벗고 앉아 세상을 째려보는 우리 아버지!
내게 아버지는 항상 일상 저 너머에서 오는 이방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으로 돌면서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신 듯하다. 가끔 집에 오셔도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와 나 사이에 별스런 대화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어색해 하신 듯하다. 누나와 어린 아들에게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으셨다. 나는 나대로 애교를 떨거나 어리광을 피울 줄 모르는 숙맥이라서 아버지 앞에 서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와 아버지와 만나는 둘만의 시간이 있었다. 그건 영화 구경 가는 날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가셨다. 극장의 어두운 의자에 파묻혀 영화를 보는 시간이야말로 내 어릴 적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그 아름다운 기억 속에 대화는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는 가족이란 일상이 낯선 세계였던 듯 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낯설어 하신 듯하다. 평생을 저 혼자 세상을 떠돈 외로운 늑대, 일상은 항상 긴장의 싸움터였고, 도박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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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한 것은 연극을 다시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내 나이 삼십대 말,아버지는 이미 팔순을 넘기면서도 집에 귀가하지 않으셨다. 밖에서 항상 새로운 사업을 벌이셨고 뒤늦게 얻은 내 이복동생들과 함께 사셨다. 나는 언젠가 아버지의 삶을 한 편의 서사시나 드라마로 구성해 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 어떤 제도적 굴레에도 갇히지 않고 살았던 ‘바람의 아들’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생애사적인 서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어떤 질문을 던져도아버지의 대답은 그 어떤 논리와 설명에서 벗어나 있었다.
“관동 대지진이 나서 조선인을 마구 때려죽일 때, 나는 산속 깊이 피신해 있었는데, 그때 만난 아이누 여자와 몇 달 살았다. 지금도 자주 그 아이누 처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다.” 그러면서 훌쩍 훌쩍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팔십구 세에 저 세상 가시면서 자신다운 유산을 남기셨다. 이복동생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아버지 시신 밑에 통장과 도장이 깔려 있었다. 통장을 여니 아버지 친필 싸인 펜으로 장례비라 쓰셨고, 달랑 삼백만 원의 저금이 남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장례비만 내놓고 사라지셨다. 비록 혁명가도 동경 유학생도 아니었지만, 한 세상 제 맘대로 살다 깨끗하게 가신 것이다. 참 기막힌 우리 아버지의 전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