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그리운 것들, 그리운 것들 -명동백작 박인환 시인

고희의 청년작가 한수산

남과 북의 연극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진 존재 - 극작가 함세덕과 말하다

린다 엘러비와 99 마리의 양

특집을 기획하며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 1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들2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외부세계의 시선들 3

동아시아 문학포럼 1기 순환고리 완성, 다시 미래를 향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33인의 성주(城主)들 대산문학상, 풍성한 가을걷이를 향해 출발 젊은 작가들의 담백한 풍경과 개성을 선하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시1 시2

카이로스의 머리카락 이태원에서

넋이로세 넋이로세

컴퓨터 글쓰기와 퇴고 독서, 책 읽는 버릇 번역의 다채로움에 대하여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텍스트의 위기와 이유 없는 침묵

한국전쟁과 김수영의 생환

풍자의 가장 자유로운 방식

권장도서 바람을 탄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

무명(無名)을 자처한 선비의 조선후기 사회평론

욕망과 좌절과 위안이 담긴 우리가 읽은 세계 위인전

「2015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외

번역후기

다시 시작이다

글 이기향 ㅣ 번역가, 독일 뮌헨공과대학 한국어 강사. 1967년생
독역서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유형의 땅』『나무들 비탈에 서다』『연어』『식물들의 사생활』 등

독역 김이설 소설 『환영』

1998년 이래 한국문학을 번역해 오면서 한번은 여성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는생각을 늘 했었다. 물론 지금은 내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2004년에 한 번역기관의 요청으로 한강 작가의 단편 「내 여자의 열매」를 번역한 것이 여성 작가와의 첫만남이었다. 좋은 인연이었고 작가와의 인연의 줄은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011년 한 재불 번역가의 한겨례 신문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문학 한류 물꼬를 튼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관한 기사였다. 곧바로 신문기사에 언급된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주문하여 읽었다. 나와 필이 통하는 작품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었다. 그 중에서 『환영』에 대한 그녀의 평은 이랬다: “김이설의 『환영』은 한번 손에 들면 쉽게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매우 흡인력 있는 작품 (……) 돈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한국 현실의 어두운 면을 잘 드러내면서도 외국 독자들이 읽기에도 무리 없는 보편성을 지녔다.”
나는 독일에서 독문학을 공부했고 2011년부터는 작은 아동문학 출판사를 운영해 오면서 유럽,특히 프랑스와 독일 독자들의 독서 경향에 대해 비교할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를 내 출판 프로그램에 반영하여 책을 만들고 있다. 유머러스하지만 철학적이고, 감성적이면서도 사회 비판적 내용이 담긴 작품들에 대한 두 민족의 호의적 독서 취향은 감정적 측면에 치우친 한국의 그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하여 아무리 독일의 베스트셀러라도 한국에서 독자를 만나지 못하고 사장되는 작품들이 있고, 한국의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독일 독자들이 열광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사실 『환영』은 유머러스하거나 감성적이지 않고 오히려 감정적이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요소만이 가득하다. 위에 언급한 재불 번역가의 『환영』에 대한 평에 어느 정도 동감은 하지만,『환영』의 내용상 과연 독일인들의 독서 취향에 비
추어 이 작품을 독일에 소개해도 괜찮을지에 대한 판단은 잘 서지 않았다.
지금껏 번역해온 작품들에 비교해 김이설 작가의 문체는 간결하고 미사여구가 적다. 불필요한 형용사가 필요 없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주인공 윤영의 삶에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관대하지 않은 작가의 태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문체는 없을 것이다.
『환영』을 쓰면서 감정이 경직되지 않을 작가가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 일인당 소득은 2만 8천불을 넘어섰다. 『환영』을 읽다보면 윤영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이는 환영속의 수치로만 보인다.
“하루에 열두 시간을 왕백숙집에서 일했다. 일당 사만 원이 채 못 되었다. (……) 왕백숙집의 메뉴중에 가장 싼 건 백숙정식이었다. 백숙과 누룽지탕, 세 가지 김치와 네 가지 반찬이 한 상이었다.내 하루 품삯으로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26쪽). 그러고 보면 작가의 세상 보는 눈은 어쩌면 대외상으로 보여주는 수치에 비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진솔할 수도 있겠다. 주인공 윤영의 소박한 바람을 — “나는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다. 일확천금을 바라지도 않았다(27쪽). 아이를 씻기고 온 방에 튄 물을 닦을 때마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그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생각했다(29쪽) — 꿈꾸는 이들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훨씬 더 많이 널려있을 것이다. 독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한국인으로서의 나는 감정적이면서도 사회비판적 작가의 성향에 모험을 걸기로 했다. 그리고 2013년에 대산문화재단으로부터 번역지원을 받아 이 작품을 번역할 수 있었다.
교정 작업이 끝나고 20여 장의 번역 발췌본을 우선 대형 출판사에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는데 6개월은 기본이고 아예 답변을 하지 않는 출판사들도 많다. 사실 대형 출판사는 문학에이전트와의 긴밀한 협력으로 작품들을 소개받고 그 중에서 출판사의 프로필에 맞는 작품을 선택하여 출판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에이전트 없이 개인이 무작정 20여 장의 원고를 보내고출판사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받기란 하늘에서 별따기다. 나도 보잘것없는 작은 출판인이지만 작가 지망생들이 보내온 원고에 일일이 답변하는 게 너무나 벅찰 때가 많다. 하여 작가의 프로필만 훑어보고 원고는 읽지도 않은 채 이미 준비된 거절의 편지나 메일을 보내기가 일쑤다. 그게 출판사의 현실이다.
그래서 대형 출판사에 일단 원고를 보내고 희망 없이 답변을 기다리면서 한국작품들을 출판한 기존의 출판사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그 중에 『환영』과 필이 맞을 만한 출판사 두 곳에 원고를 보내고 답변을 기다렸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카스(Cass) 출판사에서 답변을 주었다. 『환영』을 출간하고 싶다고. 두 번째 출판사는 한 달 뒤에 연락을 주었다. 『환영』의 내용이 출판사의 프로그램과 잘 맞을 것 같아 출간하겠다고. 하지만 그곳은 한 발 늦었다. 왜냐면 이미 나는 카스 출판사에 승낙을 했고 계약과 관련 다른 업무에 들어간 차였으니까.
17년 번역 작업을 하는 동안 매 작품마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 번역서다’라고 생각하면서 한다.
물론 이것이 마지막 작품일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번역 작업이 너무 힘들어 그냥 관두고 차라리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일종의 번역가로서의 역할 포기의 선언이다. 하지만 막상 번역된 책을 두 손에 받아 쥐는 순간 그 포기는 희망으로 다시 변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환영』의 주인공 윤영처럼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를 반복하면서 앞으로 17년도 환영 속에서 번역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했다가도 또 다시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대산문화재단의 한국문학 세계화에 대한 한결같은 경제적 지원과 노고에 번역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어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 독역 『환영』은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이기향, 카롤린 리터의 번역으로 독일의 카스에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