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표현의 자유와 비둘기 발

정신분석은 삶의 허약함과 불완전성에 대한 성찰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논평자들의 세계

직접경험의 소멸과 한국문학의 행로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정 지 된 시 간 의 발 견

인도로 가는 길

바다를 닮은 소설가 한창훈

붕당을 넘어서서 임진왜란과 그 인물들을 증언하다

매일 태어나는 신화들의 강남

연기자 겸 해설가이자 무대감독, 무성영화 시대 변사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1 시 2

매일 건강과 시 리처드 스콧 씨에게

앞으로도 궁금한 개구리들

하프를 잃어버린 시인들 카프카의 가르마 이것은 김밥이 아니다 기이한 나무를 찾아가는 길

나의 삶, 나의 문학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글 전상국 ㅣ 소설가,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김유정문학촌장. 1940년생
소설 『우상의 눈물』『아베의 가족』『남이섬』 등

▲ 전상국 © 운영자

지난 세월을 오르락내리락 뒤적여 보노라니 내가 걸어온 삶의 그 행로가 너무 순탄 평범해 겸연쩍기까지 하다. 다행히 그 밋밋한 길 위에 평생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을 갖긴 했지만 그 글쓰기마저 여봐란 듯이 내세울 게 없다.
무엇을 잡아 쥐기 위해 아등바등 애쓴 기억이 별로 없는데다 자칫 궤도라도 일탈할까 싶어 조심조심 걷다보니 그것이 남들 보기에 얼마나 따분해 보였으면 국정교과서가 걸어간다는 말에다 내인생을 빗댔을까. 넘어져 상처 받는 일이 겁나 낙법부터 익히며 산 소시민 근성이 몸에 밴 것일까 남다른 내 목소리를 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색무취 심심한 인생이지만 그 안속은 사뭇 달랐다. 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가 하면 막상 그 출구쯤에 섰다고 생각되는 순간 지레 그 끝자락이 보여 속절없이 주저앉곤 했다. 허망…….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길이 교직이었다. 다행히 어릴 때의 꿈이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40년간의 교직 생활이 그런대로 즐거웠다. 교실에 들어가는 일이 즐겁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학생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최면에 걸려 살았으니 그런대로 후회는 없지만 이쪽에서도 어떤 갇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욕구의 분출에 최적인 글쓰기와 음충맞은 내 내면의 갈등과 방황을 감추는 보호색으로서의 교직 생활을함께 하면서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알력이었을 것이다.
긴절한 바람이 하나 이뤄졌다. 1985년 3월, 꿈꾸던 서울탈출로 내 인생의 새 막이 열린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서게 된 일인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것은 은근히 전업작가에 무게를 두고 있던 내게 결정적인 덫이었다. 제대로 된 작품은 뭔가 절실할 때 써지는 법인데 이제 글 쓰는 신명이 몸에 익을만할 때 배부른 돼지가 됐으니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을 쉽게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할 때 두 마리 토끼를 잃지 않은 채 거닐 수 있는 원만한공존의 길로서의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자연은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위안이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 지랄 같은, 남의 인생이나 훔쳐보며 낄낄거리는 글쓰기 그 짓거리에 대한 환멸이 찾아오거나 교직 생활에 대한회의가 얼굴을 내밀 때 자연 속으로 도망치곤 했다.
자연과의 만남은 확실히 사람들과의 그것과 달리 항상 덧셈이었다. 나 아닌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완전한 화해를 하는 곳도 바로 자연이었다. 나는 자연 속에서만 두 개의 내가 아닌 온전한 하나의 나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찾았다고 생각한 ‘나’는 쉬 모습을 감췄다. 좁은 바닥에서 내걸린 얼굴로 살다 보니 그들에게 내보이는 내가 있을 뿐 본래의 나를 아예 잃어버리고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건축 현장을 지나다가 건물을 짓기 위해 세웠던 비계가 철거되는 것을 보면서 불현 듯내 인생이 저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곳에나 얼굴을 내밀어 나 여기 있다는 위세를 떨고 있지만 정작 본래의 ‘나’를 찾는 일과는 무관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자각 같은 것이 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무보수로 30년대 작가 김유정을 기리는 일에 미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온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봉사는 누구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잃어버리고 산 자기를 찾는 일이라고 볼 때 김유정을 위한 일은 내 문학의 길에서 글쓰기의 신명을 잃고 헤매는 잃어버린 내 얼굴 찾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 위 ㅣ 첫 출판기념회에서 필자의 은사인 황순원(가운데), 조병화 선생과 함께
아래 ㅣ ‘김유정문학촌’에서 방문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필자 © 운영자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이 말을 자주 마음속에 다지며 살았다. 물이 고여 넘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바닥부터 파헤치는 무모한 욕심을 가진 나를 경계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쓰고 싶을 때 썼다. 지금까지 원고 청탁을 받고 거기에 쫓겨 허둥거리며 글을 쓴 경우가 많지 않은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쓰고 싶을 때 쓰는, 즐김으로써의 글쓰기이고 보니 과작일 수밖에 없지만 그런 글쓰기를 통해서만 쓰는 글 한 편 한 편이 모두 내 마지막 작품이란 생각으로 열정을 쏟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내 글쓰기는 게임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자조도없지 않다. 반드시 승부가 있고 어떤 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임으로서의 문학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내 문학의 길에서 어떤 계파에 묶이거나 편파적 문학주의 집착을 멀리 한 것을 보면 나는 처음부터 전업작가의 체질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내 문학행위는 생명 현상과 다르지 않았다. 때로 문학이 나를 구원했다는 생각을 한다. 열등감 체질이 그 열등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글쓰기를 통해 얻어진 것도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글쓰기가 아니었으면 교직 생활도 오래 하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 그만큼 문학은 내가 선택한 최선의 길이었다는 생각만은 분명하다.
작가가 되는 과정부터가 그랬다.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내 글을 읽고 나한테는 유달리 어휘력과문장력이 없다는 지적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열등한 것을 감추려는 노력을 하는 중에 낱말 다루기와 문장 만드는 일을 즐기는 것으로 내 문학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탐색할 때도 그랬다. 어릴 때 멀찍이서 구경만 한 전쟁의 그 각인된 잔상들이 내 문학의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교실을 프리즘으로 한 내 상상의 알레고리가 불꽃처럼 피어올라 글 쓰는 신명으로 이어졌다. 즉 유년의 각인된 기억과 교단 체험이 내 문학의 밑천이 되었다는것이다.
돌아보면 많은 격랑에 떠밀려 살았다. 동족상잔의 6·25전쟁도 4·19로부터 비롯된 민주화·산업화 과정의 험난한 세월도 무탈하게 살아남았다. 어렸을 때 겪은 전쟁은 물론이고 나이가 들면서 겪게 된 그 격변의 파고 속에서 나는 한낱 구경꾼으로 살았다는 생각이다. 겁이 많은 데다 돌아가는 세상사가 모두 정치놀음으로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여북하면 정치꾼을 성공한 악으로 규정지으면서 그 반대편 성공하지 못한 악을 내 소설의 모티브 혹은 등장인물들로 설정하는 일을 글쓰기의 즐거움으로 삼았겠는가.
그리하여 당장 나서서 말하기보다 본 것을 그려내는 일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글쓰기의전략이 된다.

63년에 등단해 만10년 동안 작품을 쓰지 못하고 지낸 그 소비의 세월까지 합하면 50년간의 글쓰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오솔길이었다.
더 이상 달라질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지금까지 남들 앞에 애써 내보인 평범 순탄의 그 길에 분신처럼 따라 다니던 허망마저 모습을 감춘 지금 무엇을 더 탐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