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매일 태어나는 신화들의 강남
글 박주택 ㅣ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 1959년생
시집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 『시간의 동공』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평론집『반성과 성찰』 『붉은 시간의 영혼』 『현대시의 사유구조』 등
- 영등포의 동쪽 영동에서 강남스타일까지
|
1966년 서울시는 강남개발구상을 발표하여 12만호 60여만 명이 이주하는 10개년 계획을 세운다. 그때까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의 영동은 논과 밭이 넓게 펼쳐진 나지막한 구릉지에 배나무와 뽕나무 그리고 복숭아나무가 조용히 꽃을 피우고 한강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모래사장 끝에 좁은 황톳길이 펼쳐진 한적한 농촌에 불과했다. 강남대로는 강남역과 신논현역에 이르는 1km 남짓한 10차선 도로를 가리킨다. 이 대로를 기준으로 동쪽은 강남구, 서쪽은 서초구로 나뉜다. 동쪽 강남구 구역의 대로변 경관은 서쪽 서초구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CGV극장’뒤편 골목은 서쪽에 비해 한결 북적거림이 덜한 편이다. 최근에 단독주택을 개량하거나 모던한 건물로 신축한 CGV극장 뒤편으로 곧장 오르는 언덕길은 홍대 앞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카페와 음식점이 칸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남역에서 마주보이는 것은 2008년 한옥의 결구방식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디자인한 43층에 이르는 ‘서초 삼성타운’이다. 이 삼성타운은 아쉽게 사라진 ‘뉴욕제과’와 신논현역의 ‘교보타워’와 함께 강남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강남대로는 성형외과를 비롯해 병원, 다국적 기업의 의류매장과 국내 브랜드의 의류매장,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제과점, 로드숍 화장품점 등이 입점해 있다. 이곳이 언제나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것은 수원이나 용인 쪽에 학교를 둔 학생들이 하차하는 곳이고 압구정동의 유흥인구가 삼성타운과 교보타워에서 쏟아져나온 사람들과 섞이기 때문이다.
|
장소는 단순하게 자리하고 있지 않다. 어느 곳에서 이어와 흐르고 서로를 닮아간다. 어제를 수정하고 내일의 가능성으로 살아 있기를 혹은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밤이 되어 강남대로 뒤쪽으로 곧게 뻗은 뒷골목이 나이트클럽에서, 일본식 선술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은 장소의 욕망이 만들어낸 ‘지역의 유혹’이다. 그러나, 장소의 육체는 정치와 자본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부과되며 불평등하게 권력화 된다. 강남역에서 신논현역까지 인파 속을 걸으며 개인적 내부에 새겨지는 아비투스(habitus)는 밀려나가지 않으려는 추방의 불안을 느끼게 한다. 상점은 검푸른 눈을 번뜩인다. 실핏줄까지 짜릿하게 뻗어나가는 욕구를 자극하며 동작 속을 드나들다 장소에 남겨진 경험과 기억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탐문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패스트푸드점이나 파스타 가게 안, 코끝을 스치는 향과 혀끝의 촉감은 강남역 출구 앞에 세워진 ‘강남스타일’이라고 새겨진 문구 앞에서 일시 망연해진다. 빌딩으로 변한 강남대로 뒷골목이 80년대 후반 포장마차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 교보타워 자리가 자동차 운전 교습장이였다는 것. 장소에 대한 애착(topophilia)과 혐오(topophobia)가 경험에서 비롯하거나 상상에서 비롯하여 장소의 문화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 모든 것은 장소 안에 있다. 장소는 섞이며 변화하여 개인의 시간과 기억 속을 의미화 하듯 자신을 구성하여 실체로서 존재한다.
그리하여 시간이란 계급을 재편성하는 과정이 란 느낌이 들 때
햄버거는 입속에서 혈관을 터뜨리고 커피는 저 녁처럼 어두워졌다
순환하는 인간들, 청춘은 중년이 되고 또 다른 청춘은
이곳을 가득 메우며 노년에 이르게 됨을 눈치 채지 못한다
이십 년 전에도 그랬다. 포장마차가 즐비하던 자리는 고층으로 새를 부르고 검게 그을린 유리창에 잎사귀 를 부르지만
저 싱싱한 다리는 아주 기분 나쁜 팔자를 만나 저녁의 숙명에 흘러가는 것을
- 졸시 「강남역」 부분
|
육회를 파는 ‘서초동 연가’나 여름이면 사람으로 가득 찬 간이의자 수백 개가 놓여 사평로를 오가는 차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전주 막걸리’집을 지나 감정과 육체로 섞인 공간들을 걷고 있는 동안 이윽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 수만큼 전단지는 강렬하고도 뒤틀린 눈빛을 반짝인다. 비가 오나 폭염에 살이 짓무르더라도 혹한 속에서도 거리마다에서 키스와 마사지를 유혹한다. 짧은 치마의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과 오직 마른 입술로 헐떡거리는 바지들 틈, 세계는 환영(幻影)처럼 펼쳐져 이곳이 카니발 공간임을 알리고 이곳에서 청춘은 환하고, 빛나는 간판 불빛 아래에서 취한 육체가 데려가는 먼 곳으로 간다. 술에 파인 홀 속에는 자신이 아니어도 기쁨과 영혼을 깊숙이 숨어 만나는 밤과 새벽이 있을 뿐. 육체는 영혼의 동의 없이도 몽롱하게 태어난다. 태어난다는 것, 새로 이름을 바꿔 단 술집 속에 과장된 도취를 들앉히고 그 안에 머문다는 것. 어떤 영롱한 눈빛들은 그것을 고깝게 보기도 하겠다. 주먹에 앞니가 보도블록에 떨어지고 피가 옷을 적실 때면 천천히 경찰차는 나타나고, 마약에 취한 여자가 벌거벗고 흐느적댈 때 동영상을 담는 인파의 둥근 원 속에서 슬픔 몇쯤은 새어도 나올 수 있겠다. 그러나 발작적인 이곳의 원주민은 청춘들. 사람들 속에 서서 나뭇가지 속에서 우는 매미들을 볼 때 직하할 것처럼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간판들. 더 따스한 햇볕은 미래 속에나 가 있는 것처럼 옷가게는 감정들을 정류장마다 풀어 놓고 ‘스타벅스’도 ‘파리바게트’도 거리를 향해 자신의 말을 풀어 놓는다. 영원한 것들은 열락의 뒤편에서 몸을 씻는다. 하여, 이곳은 원적이 바뀐 등본처럼 출생을 가장하고 대로를 질러가는 자동차처럼 특권적이다. 불현듯 쾌속으로 깨어나는 허기 속에서 저장된 전화번호를 들여다보는 순간, 혼자 있어도 외롭고 함께 있어도 외롭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거리의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 수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지상의 세계를 수직의 세계로 끌어올린다. 버튼 소리와 함께 침묵 속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는 것. 아득한 현기를 느끼며 유리창 너머 건물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 전체를 내려다본다는 것. 그것은 날개의 환유이자 꼭대기의 환유.
내가 아파야 비로소 내가 된다
내가 아파야 비로소 별이 되고 강이 된다
햇빛 아래서 나무의 긴 지느러미는 반짝이고
덧문을 열고 차를 마시는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가 해변이다, 안면도 혹은 청산도쯤
갈매기는 날고 그 갈매기를 통하여 해변은
다시 태어난다, 저 치솟은 건물들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멀게 만드는가
- 졸시 「여름들」 부분
|
시선은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기억 안에 구겨 놓고는 깜빡이는 눈꺼풀과 함께 모든 것을 닫아버린다. 찻집 유리창에 고인 음성들. 다리를 꼬느라 의자를 기우뚱거리는 치렁한 머리 뒤쪽 건물에서 꿈틀거리며 새어나오는 숨들. 불안은 누군가의 숨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날개를 펄럭여 전체를 펄럭거리지만 두꺼운 페이지에서 뽑혀 나오는 문장들은 외벽을 타고 바람과 만나 언제인가를 기약한다.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자정의 카페에 앉는다. 낮은 촉광아래 책이 정신을 입히지 못한 일주일처럼 건성으로 탁자가 놓여있고 무기력하게 창밖의 뿌리를 바라볼 때 술잔에는 온갖 주석이 붙어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물리칠 수 없는 유혹과 감당이 끝난 침묵. 파멸일지도 모르고 감미로움일지도 모르는 종결과 시작은 참을성을 시험한다는 것. 문을 열어놓고 나온 사람처럼 봄꽃은 지나가고 변함없이 더위도 지나가고 마지막 술잔 방울은 가책하는 독방처럼 눌러 붙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