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매일 건강과 시
글 조경란 ㅣ 소설가. 1969년생
소설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일요일의 철학』 등
그녀는 이 도시에 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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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다섯 채의 커다란 쓰레기통들이 주인처럼 보이는 거리였다. 집은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 3층에 있었다. 안쪽 1층 집 앞에 빨래 건조대를 세워놓아 지나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12월인데다 이곳의 엄청난 집세에 비하면 방을 얻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편이 나았다. 집 대리인이라고 밝힌 여자는 숨긴 것이 없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세금은 집값에 포함되고 세탁기와 보일러실이 있는 옥상은 혼자 쓸 수 있다, 라고 했으니까. 집을 소개한 사진들을 그대로 믿었던 것도 아니다. 사진 속에는 바람이 불면 고장 난 덧창들이 벽에 부딪쳐 내는 소리와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난다는 사실들이 생략돼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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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대리인은 아래위로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식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 혼자 3층까지 트렁크를 들어 올리는 것,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을 지켜보러 온 사람 같았다. 두꺼운 패딩과 목도리 속으로 그녀는 겁이 나려는 자신을 밀어 넣곤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여자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한 달 치 집세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그 집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항공권을 예약하고 낯선 도시에서 지낼 곳을 알아보자 동생이 제주도도 안 가본 사람이, 했다. 같이 살고 있는 어머니는 네가 가긴 어딜 간다고, 믿으려 들지 않았다. 직장에 사표를 냈을 땐 어머니도 동생도 더 이상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도시로 날아와 집을 계약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데 놀랐다. 매년 휴가 때마다 이런 일을 해왔던 것처럼. 휴가 때마다 그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베개를 등에 대고 앉아 책을 펼쳐들 뿐이었다. 그러면 사막이나 북극까지,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일부러 낯선 도시를 헤매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다 말고 대리인에게 물었다.
이 집은 안전하니?
자신이 듣기에도 서툰 외국어라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물론이지, 이 집은 안전해.
에리카라는 이름의 대리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 있는 도시였다. 시내 어디든, 좁은 골목들 사이사이에도 크리스마스트리를 해 놓아 도시 전체가 계속 흔들어 눈을 뿌려대는 수정볼 같아 보였다. 그녀는 지도도 들지 않은 채 그 속을 걸어 다녔다. 무턱대고 걸어 다녀도 모든 골목들이 연결돼 있는 것 같았다. 광장과 분수와 성당들. 492번 버스 노선은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면 집으로 가는 방법만은 기억하는 게 좋을 거였다. 그가 살았던 집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기사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그날 아침 신문을 보고 알 수 있었던 사실은 그가 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 사고로 죽은 자들의 명단 속에 있었다는 것.
미리 정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몇 가지 그녀에게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행정실에서 시간제 일을 시작하다 직업이 돼 버린 일도 그렇고 부모와 살던 집에서 독립을 할까 하던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 서른아홉을 앞둔 가을에 그의 사고 소식을 읽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일들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지금 기억하는 건 그게 다였다. 세 번째 일은 앞의 두 일보다 크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은 순종해 버리고 지나갈 수 없는 일이었다. 대개의, 앞날이나 미래에 관해 짐작하게 하는 일들처럼. 시인이 되겠다거나 가정주부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지만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 명이라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싶다는 바람같이 혼자 애를 쓴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소한의 반경 속에서 그녀는 마흔이 되기 전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에 관한 마지막 소식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찾아온, 그녀가 한 결심을 부추기려는 속삭임 같았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된다는 걸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처럼은 살 수도 없었다.
492번 버스는 라르고 아르젠티나 광장 앞도 지나갔다. 버스 정거장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 이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이었다. 그녀가 읽어낼 수 있는 책들은 한 권도 없었지만 그가 여기 와서 읽었을 만한 책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50센트를 주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고 언제나 만원인 2층 카페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을 수도 있게 되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하루를 보내려면 화장실과 마실 물과 잠시 앉아 있을 곳이 필요했다.
이 도시에 도착한 두 번째 주말에도 그녀는 이 광장에 왔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올수록 어떤 길은 걷는다기보다 인파에 떠밀려 다니는 것 같을 때가 많아졌다. 비가 아니면 짧은 햇빛. 서울로 치면 초가을 비슷한 날씨인데도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듯 사람들은 털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다녔다. 퍼로 만든 방울이 달린 털모자가 유행이었다. 그녀도 옷을 껴입고 노점에서 산 털모자를 쓰곤 인파가 움직이는 대로 걷고 인파가 사라지면 가로등이 켜지는 방향 쪽으로 걸었다. 그 첫 번째 주말 오후에 아르젠티나 광장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한 거리음악가를 보았다. 서점 정문 옆이었다. 뒤집어 놓은 프라이팬, 플라스틱 물통, 바가지나 대야 비슷한 용기들, 크기가 다른 스테인리스 그릇들을 스틱으로 두드려가며 내는 소리가 관광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목 뒤로 땀이 흐르는 것 같아 털모자를 벗어 손에 든 채 그녀는 관광객들 속에 섞여 연주를 들었다. 그럴 듯 하지도 않고 좋은 소리를 낼 것 같지도 않은 생활용품들을 모아 놓고 두드리는 소리가 박자 때문인지 리듬 때문인지 아니면 날씨 때문인지 반짝거리고 부풀고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이 들려왔다. 두드리고 치고 문지르고 쓰다듬고……
연주자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자기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서점에서 책을 찾고 있었다.
어땠어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괜찮았죠?
마지못한 듯 옆을 돌아봤다. 방금 전 밖에서 털모자를 벗다 눈이 마주친 동양 남자였다. 나한테 얘기하는 건가요?
키가 작고 머리를 스포츠머리처럼 바짝 밀어버린 남자에게 되물었다. 물론이지요, 하는 태도로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주 말예요.
글쎄요, 좋았어요. 난 음악에 대해선 모르지만.
그런 건 잘 몰라도 돼요.
남자가 씩 웃었다. 그녀가 서가 쪽으로 눈을 돌리려는데 다시 남자가 말했다.
나도 음악은 잘 모르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연주자네요.
아, 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야기를 그만 끝내자는 뜻으로.
나는 레이. 이름이 뭐예요?
미숙.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서울. 당신은요?
저기, 자니콜로 언덕에서요.
어디죠, 거긴?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라고 할까요.
그녀는 수줍게 웃고 있는 듯한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저런 사람들?
그러니까 내 말은.
남자는 말을 고르고 싶어 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혹은 자신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거나.
뭐, 화가나 건축가나 사진작가 같은 사람들요.
……거기 혹시 작가도 있나요?
남자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 그녀는 물었다.
그럼요, 당신도 작가인가요?
아뇨, 아니에요.
무슨 책을 찾고 있어요?
아뇨, 난, 이제 이층 카페로 갈 거예요.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봄호 지면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