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과 스웨터와.... 징검다리 -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서정시로 쓴 마음의 신화 - 시인 김명인 선생과의 만남
탈경계 시대, 우리 안의 경계들 언어의 소통과 경계 허물기 연말정산과 피케티 동포로서의 타자,타자로서의 동포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누군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송곳처럼 빛날 그날을 향한 출발 문화를 흔들고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 해외문학기행
시
아이가 가지고 놀다가 방치해 둔 레고 조각들.
무언가로 만들어졌다가 해체되었거나 조만간 어떤 형태로 구성되기를 기다리는 플라스틱 조각들. 부질없고 하릴없지만 그런 걸 갑자기 골똘히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문득, 손을 대지 않고도 그것들이 만들어낼 형상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완성된 실물보다는 상상 속에서 이합집산하는 형상들의 그림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게 실체보다 더 강력하다고 여겼다. 시에 사용되고 잊히는 언어들이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씌어져 고정된 언어엔 이상하게 시가 없다.
잔해들의 시적 운용, 그리고 탈바꿈과 해체.
나는 지금 잘게 부서진 파편들 앞에서 잘 놀고싶은 아이에 불과하다.
피아노의
피안
멀리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탕탕 튕겼다
어떤 목숨 줄이 정해진 행렬 바깥에서
허공을 음각하는 소리
어떤 몸뚱이가 껍질을 벗고
먼지의 켜들을 밝히는 소리
먼 데서 몰려오는 적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온정은 오직 이것뿐
멀리로 사라진 사랑에게 닿을 수 있는
남겨진 흥분의 촉은 오직 그것뿐
소리 사이 사이의 침묵에게
대거리해줄 공간을 몸 안에 펼쳤다
새가 날고 햇빛이 어른거린다
너는 그게 죽음 쪽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곡小曲이라 여길 것이리
몸 속 가장 낮은 곳의 소리를
우물처럼 퍼 올려
소리가 메워버린 침묵의 구멍을 더 깊게 하였다
소리가 비워진 하초下焦엔
뿌리가 어디인지 모를 꽃들이 수런거린다
나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느릿느릿 코피를 흘리고
더 먼 데로 직립하는 몸의 뿌리로 꽃들을 끌어당겼다
상부의 피가
하부의 정열을 색깔 입혔다
하부의 파탄이
상부의 치열을 조롱하였다
내 몸은 침묵의 사선에서 수평으로 길게 누워
먼 데서 돌아오는 네가
아무도 듣지 못한 천계의 음률을 조각조각 새겨 넣길 원했다
꽃들이 돌 틈 사이에서
마그마처럼 울었다
나는 먼 곳의 소리가 이승 길을 더듬는,
차가운 잿더미의 도판圖板이 되었다
화염무지개
무슨 부정한 짓은 아니었을 건만, 나는 너와 뭔가 저지르고 싶었다
네가 없었어도,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저지르고 말았을 일을, 저지르
지 않고는 내가 내가 아니고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아니게 될 그럴 일
을 저지르려 했을 뿐이다 깊은 수렁이었거나 까마득한 사막의 어느
구릉 사이 모래로 쌓인 침실 같은 곳에 도달해 나는 너를 쓰러뜨렸다
쓰러짐이 없으면 시작되지도 않을 일, 다시 일어서면 다시 모래로 가
라앉아 태양이 훑고 가는 머나먼 지평의 끝이 바다로 떨어지는 그럴
일, 바다에서 용솟은 지상의 온전한 뿔이 태양의 음부를 들쑤시고
그렇게 검은 꽃비가 천지를 가득 메우게 될 일, 그러나 나는 실패하였
다 너를 쓰러뜨린 사구의 침대엔 너 아닌 누가 누워있었다 혀를 물큰
씹어 물게 하는 그것이 살의殺意라는 걸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정수
리 끝에 불이 붙어 두 팔을 휘저으면 흡사 이곳이 해저라도 되는 양
공기의 밀도를 크게 바꾸며 헤엄이라도 칠 수 있을 듯했다 살의라는
게 매우 상쾌하고 마음 북돋게 하는 감정이라는 걸 새삼 알았다 누
워있는 자는 낯이 익었으나 누워있는 자세는 매우 낯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알던 사람인 듯싶었으나 그런 생각을 하자 내가 한 번도 태어
난 적이 없었다는 자각도 동시에 들었다 몸 밖의 바람이 몸 안의 바
람을 접고 이생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물들의 형태를 일깨우고 지우
며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누워있는 자는 가만 보니 수 년 전 죽은 숙
부였다 살아선 보지 못한 숙부의 해골이었고 만나선 들어보지 못한
소리로 얼큰하게 숨을 쉬었다 네가 보이지 않았다 달아났는지 숙부
의 살 속으로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매우 꾸중 받는 아이의
심사로 숙부의 말을 들었다 숙부라 여겨 숙부라 깨달았을 뿐, 그는
사실 사람이기도 사람 아니기도 하였다 숙부의 탈은 내 머릿속에서
가공되었거나 죽은 뒤에나 꾸게 될 꿈을 미리 덮어씌워 순간의 당혹
을 감추려한 작당인지 몰랐다 숙부를 숙부라 일컬으니 한 조각 모래
더미조차 숙부가 되어버리는 사변事變의 비밀을 나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저지를 그 어떤 일의 내용에 대해서도 오
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니 죽음의 틈을 빠져나와 우리의 침
소를 선점해 맨살의 해골로 누워있는 숙부 또한 너의 온전한 몸속이
거나 내가 꾸는 네 몸 속의 허방에서 주조된 무지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숙부가 사라지는 걸 그렸다 숙부는 모래 한 톨 한 톨을 모
공 삼아 부드럽게 지워졌다 지워지는 소리가 청천벽력이라고 너는 말
했다 나는 그 들리지 않는 말을 네 몸에 그렸다 그릴수록 지워지는
네 몸이 내 안에 있었다 너를 핥으니 내 모공 속에서 연기처럼 발기
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지상에서 많은 사랑이 있었고 사랑 속에서 어
떤 시간들이 새가 되고 모래가 되었다 나는 너를 끌어안았다 세계의
궁륭이 으스러졌다 모래 속에서 새들이 고개 들었다 씹어 삼키면 불
덩어리로 날아오를 무지개를 깨물고 있었다
시 2
강정 ㅣ 시인. 1971년생.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콤마 씨』,
산문집 『루트와 코드』 『나쁜 취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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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로 만들어졌다가 해체되었거나 조만간 어떤 형태로 구성되기를 기다리는 플라스틱 조각들. 부질없고 하릴없지만 그런 걸 갑자기 골똘히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문득, 손을 대지 않고도 그것들이 만들어낼 형상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완성된 실물보다는 상상 속에서 이합집산하는 형상들의 그림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게 실체보다 더 강력하다고 여겼다. 시에 사용되고 잊히는 언어들이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씌어져 고정된 언어엔 이상하게 시가 없다.
잔해들의 시적 운용, 그리고 탈바꿈과 해체.
나는 지금 잘게 부서진 파편들 앞에서 잘 놀고싶은 아이에 불과하다.
피아노의
피안
멀리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탕탕 튕겼다
어떤 목숨 줄이 정해진 행렬 바깥에서
허공을 음각하는 소리
어떤 몸뚱이가 껍질을 벗고
먼지의 켜들을 밝히는 소리
먼 데서 몰려오는 적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온정은 오직 이것뿐
멀리로 사라진 사랑에게 닿을 수 있는
남겨진 흥분의 촉은 오직 그것뿐
소리 사이 사이의 침묵에게
대거리해줄 공간을 몸 안에 펼쳤다
새가 날고 햇빛이 어른거린다
너는 그게 죽음 쪽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곡小曲이라 여길 것이리
몸 속 가장 낮은 곳의 소리를
우물처럼 퍼 올려
소리가 메워버린 침묵의 구멍을 더 깊게 하였다
소리가 비워진 하초下焦엔
뿌리가 어디인지 모를 꽃들이 수런거린다
나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느릿느릿 코피를 흘리고
더 먼 데로 직립하는 몸의 뿌리로 꽃들을 끌어당겼다
상부의 피가
하부의 정열을 색깔 입혔다
하부의 파탄이
상부의 치열을 조롱하였다
내 몸은 침묵의 사선에서 수평으로 길게 누워
먼 데서 돌아오는 네가
아무도 듣지 못한 천계의 음률을 조각조각 새겨 넣길 원했다
꽃들이 돌 틈 사이에서
마그마처럼 울었다
나는 먼 곳의 소리가 이승 길을 더듬는,
차가운 잿더미의 도판圖板이 되었다
화염무지개
무슨 부정한 짓은 아니었을 건만, 나는 너와 뭔가 저지르고 싶었다
네가 없었어도,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저지르고 말았을 일을, 저지르
지 않고는 내가 내가 아니고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아니게 될 그럴 일
을 저지르려 했을 뿐이다 깊은 수렁이었거나 까마득한 사막의 어느
구릉 사이 모래로 쌓인 침실 같은 곳에 도달해 나는 너를 쓰러뜨렸다
쓰러짐이 없으면 시작되지도 않을 일, 다시 일어서면 다시 모래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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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검은 꽃비가 천지를 가득 메우게 될 일, 그러나 나는 실패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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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적이 없었다는 자각도 동시에 들었다 몸 밖의 바람이 몸 안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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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모래폭풍을 일으켰다 누워있는 자는 가만 보니 수 년 전 죽은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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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얼큰하게 숨을 쉬었다 네가 보이지 않았다 달아났는지 숙부
의 살 속으로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매우 꾸중 받는 아이의
심사로 숙부의 말을 들었다 숙부라 여겨 숙부라 깨달았을 뿐, 그는
사실 사람이기도 사람 아니기도 하였다 숙부의 탈은 내 머릿속에서
가공되었거나 죽은 뒤에나 꾸게 될 꿈을 미리 덮어씌워 순간의 당혹
을 감추려한 작당인지 몰랐다 숙부를 숙부라 일컬으니 한 조각 모래
더미조차 숙부가 되어버리는 사변事變의 비밀을 나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저지를 그 어떤 일의 내용에 대해서도 오
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니 죽음의 틈을 빠져나와 우리의 침
소를 선점해 맨살의 해골로 누워있는 숙부 또한 너의 온전한 몸속이
거나 내가 꾸는 네 몸 속의 허방에서 주조된 무지개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숙부가 사라지는 걸 그렸다 숙부는 모래 한 톨 한 톨을 모
공 삼아 부드럽게 지워졌다 지워지는 소리가 청천벽력이라고 너는 말
했다 나는 그 들리지 않는 말을 네 몸에 그렸다 그릴수록 지워지는
네 몸이 내 안에 있었다 너를 핥으니 내 모공 속에서 연기처럼 발기
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지상에서 많은 사랑이 있었고 사랑 속에서 어
떤 시간들이 새가 되고 모래가 되었다 나는 너를 끌어안았다 세계의
궁륭이 으스러졌다 모래 속에서 새들이 고개 들었다 씹어 삼키면 불
덩어리로 날아오를 무지개를 깨물고 있었다
